전라도 지방에서 우리의 생활

1656년 3월초 우리는 말을타고 한양을 떠났다. 강까지 벨테브레와 평소 안목이 있던 몇명이 동행했고 나룻배에 몸을 실었을때 그들은 되돌아 갔다. 그것이 벨테브레를 본 마지막이었다. 우리는 다시는 그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했다. 

우리는 영암 시로 들어가 예전과 똑같은 도시를 지나쳤다. 우리가 머문 모든 새 도시에서 국비로 숙박하고 전과같이 새로운 말과 식량을 제공받았다. 며칠 후 우리는 병영(강진)에 도착했다. (하멜은 이곳을 Duijtsiang or Tiolla Peingh , 라 부름. 클릭하면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음. ). Peingse (Pyongsa-평사)의 지방 군사령 관은 지방관의 즉각적인 지휘하에 있었다. 우리는 경위관에 의해 한양에서 보내진 세명을 인계하라는 명령을 받은 사령관에게 건네졌다. 명령을 수행중인던 부사령관은 한양에서 12마일 거리에 살고 있었 다. 우리는 즉시 현지가옥에서 함께 살았고, 3일이 지난후 3명이 합류 해서 모두 33명이 되었다. .

4월에 우리는 제주도에 있었던 동물의 가죽을 받았 다. 이것은 한양으로 보낼만큼 중요하지도 않고 별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제주도에서 10마일 남짓한 하변 가까운 곳에서 거명된 품목을 받을 수 있었다. 이 물건 덕분에 우리는 다시 의복을 갖춰입고 새로 머무를 곳에서 필요한 것들을 마련할 수 있었다. 총독은 우리에게 한달에 두번 시장이나 시청앞 광장의 풀을 뽑고 깨끗이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657년초에 지방관은 뇌물혐의로 자리에 서 물러났다. 그는 백성과 양반모두에게 사랑받았고 백성들은 왕에게 그를 너그러이 대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들의 중재덕에 그는 사형은 면하고, 다른 자리를 하나 얻었다.

2월에 새로운 지방관이 도착했다. 그로인해 우리의 상황이 나빠졌다. 전에는 땔감으로 쓸 장작을 받았으나 이번에 직접 잘라서 써야했다. 게다가 그는 우리를 혹사시켰다. 땔감을 얻기위해 우리는 산지를 6마일가량 돌아 다녀야 했다. 그가 심장병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들었을땐 우리는 행복해 했다. 

11월에는 새로운 지방관이 도착했다. 그로인해 우리가 살아가는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우리가 그에게 옷살 돈이나 다른 급여를 요구했을때 그는 단지 왕으로부터 정량의 쌀만 제공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말했다. 가까스로 우리는 삶을 지탱해 나갈 수 밖에 없었다. 계속해서 나무를 나르느라 옷이 헤어져서 새옷이 필요했는데 그런 이유로 우리는 지방관에게 구걸을 허용해 달라고 했으나 그런 예의 없는 행동은 중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했다.

지방관은 일주일에 4일간을 농가나 수도원에서의 구걸을 허용했는데 이곳에는 그런 곳이 많이 있었다. 농민이나 승려들은 매우 궁금해하며 우리나라와 사람들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돈을 주면서 매우 즐겨 들었기 때문에 이런 구걸은 금전적으로 대성공이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겨울을 지낼 새 옷을 구입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이번 겨울은 한양에서 겪었던 것보다 훨씬 덜 추웠다. 

1658년 이전의 지방관을 대신하여 새로운 지방관이 부임했다. 새로 부임한 지방관은 우리의 행동의 자유를 제한했고 각자 아마포 세 필에 대한 대가로 매일 일을 시켰 다. 일을 함으로해서 옷이 더 빨리 낡았기 때문에 우리는 탐탁치않게 생각했다. 게다가 음식 이 부족하고 생활비도 많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20일동안 주기적으로 살던 곳을 벗어날 수 있게 해달라고 한것이다. 이 기간동안 우리는 나무를 잘라 농부에게 팔아서 삶을 지탱할 수 있었다. 

지방관은 우리가 살던곳에 질병이 퍼져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우리들중 몇몇은 열이 매우 심각했다. 조선인들은 질병을 몹시 두려워했다. 지금까지 행동의 자유가 제한되어 우리는 수도나 일본영토 근처에 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달에 두차례 잔듸 가꾸는 임무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환자를 돌보기 위해 우리들 중 두 명을 남겨두고 떠나야 했다.  

1659년 4월 왕이 서거했다. 청나라 사람들의 인정하에 장자가 왕위를 계승했다. 나무를 팔고 승려들에게 구걸하는 일이 전처럼 계속 되었는데 농부들에게 보다는 승려들에게 구걸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그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이 많아서 우리의 관습이나 우리가 가 보았던 다른 나라들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하기만 했다면 몇일밤동안 이야기 해줄수 있었을 것이다. 

조선은 청의 속국 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왕은 그들의 허가없이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다. 이것은 형식적인 것 이었으나 절차를 거쳐야 했다. 

1661년 봄에 또다른 지방관이 부임했다. 그는 우리들에게 매우 호의를 가지고 대했다. 그는 종종 자신이 이 일을 처리할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우리들을 오래전에 이미 우리들 나라로 돌려 보내게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지방관으로 있는동안 우리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불행하게도 계속된 가뭄으로 수확량이 감소하여 올해와 그 이듬해 극심한 식량부족 사태가 닥쳤다. 1662년 봄에는 기아로 수천명이 죽었고 도처에 노상강도가 들끌었다. 이런 이유로 왕의 군대가 도로를 끊임없이 순찰하고 다녔다. 그들은 또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사체를 치우는 임무도 맡고 있었다.
몇몇 마을은 강도들에 의해 약탈 당하고 왕에게 바칠 물품이 저장된 창고도 털렸다. 굶주림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도토리와 나무껍질과 뿌리로 연명했다.

굶주림이 3년간 계속된 1663년초에 수많은 사람이 굶어죽어서 나라 전체의 인구가 감소되었다. 남쪽으로 강어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비에 의존하는 일이 적었기 때문에 여전히 벼를 재배할 수 있었다. 그렇치 않았다면 인구 전체가 죽었을 것이다. 어떤 때는 지방관이 우리에게 월마다 주는 쌀을 줄 수 없었다. 그때문에 그는 왕에게 우리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 달라는 내용의 서신을 썼다. 2월에 우리들을 세 도시로 분산시키라는 명령이 왔다. 우리는 22명이었는데 이로써 12명은 여수 좌수영으로, 5명은 순천으로 나머지 5명은 남원( van Hove는 Namman이라 함. 으로 보내졌다. 

우리는 이 이동에 대해 많은 후회를 했는데 Duijtsiang 에서는 멋진 정원이 있고 우리나라 풍에 맞게 정원을 가꾼 멋진 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새로 시작하기 위해 이런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다. 그럴 시간도 부족했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이런 이동이 나가사기로 가게 되었던 우리 동료들에게는 행복했던 상황이었던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이 순간을 예견할 수 없었다. 

남쪽 해안에서 

1663년초에 우리는 지방관에게 그가 우리에게 대해준 것에 감사하고 작별을 고한뒤, 다른 곳으로 떠났다. 우리는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 단지 환자들과 우리가 가지고 갈 수 있게 허락된 몇몇 가지를 위해 말 몇필은 우리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순천과 여수 좌수영으로 갔던 사람들은 같은 길을 택했다. 4일후 우리는 순천에 도착해서 정부소유의 창고에서 하루밤을 지내고 다음날 순천에 남게될 4명의 동료와 작별을 하고 길을 떠났다. 우리는 같은날 저녁에 여수 좌수영에 도착해서 지방관에게 인계되었다. 

그는 우리들을 갖춰진 거라고는 거의 없는 집에 머무르게 했고 일정한 쌀배급을 했다. 그는 우리에게 친절했고 성격도 좋았던 것 같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가 도착하고 이틀 뒤 그는 떠났다. 3일뒤 새 지방관이 도착했는데 그는 우리에게 매우 난폭했다. 여름에는 뙤약볕에 세워두었고 겨울에는 비나 진눈깨비 속에서 이른 아침부터 저녁늦게까지 있게 했다. 

날씨가 좋은날에는 나뭇가지를 잘라 궁술가들이 쓸 화살을 만드는 일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아마도 훌륭한 궁술가들을 거느리는 것이 지방관들에게는 큰 명예였던 것 같다. 그는 입에 담기어려울 만큼 아주 역겨운 일도 시켰다. 

겨울이 거의 다가오자 우리는 새옷이 필요했고, 지방관에게 여섯명은 일하게 하고 나머지 여섯명은 외출하게 해달라고 했다. 그들이 구걸하거나 나무를 팔아서 돈을 모을 수 있었다. 공식 적으로는 이런일이 허용되지 않았지만 결국 묵과되었다. 이런 생활이 1664년까지 지속되었고 지방관이 더 높은 관직으로 가게되자 그 후임이 왔는데 훨씬 더 너그러웠던것 같았다. 

그는 즉시 우리들을 노동 임무에서 덜어 주었다. 우리들은 원래 약속한데로 한달에 두번 상황보고만 하면 되었다. 게다가 어디를 갈때마다 매번 지방관의 집무실에 보고해서 그들이 우리를 필요로 할 때 어디 갔는지 찾을 수 있도록 해야했다. 

마침내 우리는 이제 우리의 삶을 비참하게 했던 구질구질한 인간에게서 벗어났다는데 대해 신에게 감사했다. 그리고 그의 후임자는 우리에게 매우 친절했는데 자주 집으로 초대해서 향료와 음료로 따뜻한 접대를 했다. 그는 또한 우리의 조국에 대해 모든것을 알고 싶어했다. 그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왜 일본으로 가려고 하지 않았는지 궁금해 했다. 우리는 그렇게 할 허가를 받지 못했고 더구나 마음대로 사용할 적당한 배도 없었다고 대답했다. 그는 이런 해변마을에는 아무데나 사용할수 있는 배가 충분하다고 심술ㄱ게지적했다.

자칫하다가는 탈출혐의는 물론 절도죄로 벌을 받게될 것 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에게 우리 소유가 아닌 배는 감히 이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시켰다. 우리는 그가 의심하지 않게 하려고 이런 말을 했다. 그는 우리가 이런 말을 할때마다 실컷 웃곤 했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자 우리는 그것을 이행할 것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했다. 우리는 해안에서 고기를 잡을 수 있는 배를 사려고 했지만 그러나 아무도 배를 팔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 지방관의 엄한 지배하에 오랫동안 살아왔기 때문에 명령을 잘 이행했고 후에 벌받게 될 것 같은 일에 대해서는 쉽사리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해가 끝나갈 무렵 우리는 잠시 하늘에서 발생한 두개의 혜성을 보았다. 그중 하나는 남동쪽에서 거의 두달동안 볼 수 있었다. 그 후 또 하나가 남동쪽에 나타났다. 이런 천체의 출현은 이 나라 사람들 에게 커다란 두려움을 가져왔다. 전함이 태세를 갖추고 항만의 경계가 강화 되어 모든 군사기지에는 여분의 식량과 군수품이 지급 되었고, 기병과 보병은 매일 훈련을 했다. 어떤 램프도 밝힐 수 없었고, 특히 해변주변의 도시에서는 더욱 그랬다. 이런 두려움은 청나라의 침입을 받으면서 일기 시작했는데 일본과의 전쟁 초기와 같이 청나라의 침입때 하늘에서 유사한 징조가 있었다. 많은 조선인들은 우리들도 이런 천체의 출현을 나쁜 징조로 생각하는지 물었다. 우리는 네덜란드에서도 이런 유사한 것들이 나타나면 재앙이나 전쟁이 일어나고 홍수나 전염병이 돌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런 경계가 심한 상태에서 배를 구하기란 더욱 힘들었다.전쟁에서 못쓰게 된 물건에 대한 감시가 더욱 심해져 배로 탈출하기란 매우 힘들었다. 상황은 절망적 이었지만 우리는 운명을 받아들였다. 결국 우리 모두 이국에 머무르는 인질이었고 머리위로 지붕이 있고 살아 갈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 행복해 해야했다. 

한동안 지방관이 차례차례 뒤를 이었다. 그들중 몇은 우리를 매우 친절히 대했고 또 다른 몇은 이런 특권에 대해 탐탁치 않은 시각이었다. 한 지방관은 하루종일 쌀을 밟게했고 어떤 이는 새끼 100길(1길=1.83m)을 꼬게 했다. 우리는 강력하게 항의했고 우리를 결코 노예로 만들 마음이 없었던 왕에게 간청도 했다. 그러나 암흑같은 시간은 끝날줄 몰랐다. 우리에게 쌀을 밟게 했던 지방관은 기적적으로 잠시 우리가 떨어져 있을 때도 필요하면 강압적으로 우리를 구속했다. 매일 행해진 함대 훈련도중 부주의로 화약통이 폭발하는 바람에 승선했던 5명이 숨졌다. 지방관은 이 일을 비밀로 하려고 했으나 도처에 있는 정탐꾼에 의해 왕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결과 그 지방관은 체포되어 조정으로 압송되어 죄과로 불명예스러운 사임과 곤장 90대에 종신 유배를 당했다. 새 지방관이 우리에게 새끼를 꼬게 했을때 우리는 기적을 바랬으나 눈앞에 닥친일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심장병도 조정과의 충돌도 없었다. 지금까지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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