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에서

다시 여러 날을 여행하여 여러 고을과 마을에서 밤을 지새운 후 마침 내 큰 강(한강)을 지나게 되었다. 이 강은 도르드렉흐트(Dordrecht) 근처 마스(Maas) 강 만큼이나 넓었다. 그 강을 건넌 후 몇 마일 말을 달려 우 리는 큰 성으로 둘러싸인 시오르(sior:서울)라는 곳에 도착하였다. 이곳 은 왕이 사는 곳이었다. 우리는 약 70~75마일을 더 여행하였다. 대체 로 북쪽으로 향하였지만 가끔씩은 북서쪽을 향해 가기도 하였다.

   도시에 도착하여 우리 모두는 2~3일간 한숙소에서 함께 머물렀다.그 다음 우리는 한 집에 두 명, 세 명 혹은 네 명씩 나뉘어져 중국에서 도망쳐 와 한양에 살고 있던 중국인들과 함께 생활했다. 이렇게 각 집으로 분산되자마자 우리는 왕의 부름을 받았고 왕은 벨떠프레이를 통 해 우리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였으며 우리는 모든 질문에 성심껏 답변하려고노력하였다. 우리는폭풍으로 배를 잃고 낯선 땅에 오게 되어  

  부모님과 아내, 아이들, 친구, 약혼자와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되었으니 자비를 베풀어 가족들이 있는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일본으로 보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왕에게 정중히 딸하였파. 그러자 왕은 벨떠프띠를 통해 "이방인들을 이 땅에서 떠나 보내는 것은 이 나라의 관습이 아니므로 여기에시 평생 살아야 하며 대신 우리를 부양해 주겠다"고   말했파, 왕은 우리에게 네덜간드식 노래를 부르게 하고 춥을 추게 하였 우리가 배운 모든 것을 해보게 하였다. 왕은 우리에게 융숭한 대펍을 한후 각자에게 아마포(亞麻佈) 2필씩을 선물했으며, 이것으펄 우리는 처음으로 조신식 의복을 입게 되었다. 그런 후 우리늘 다시 우리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날 총사령관의 부름을 받았는데 벨떠프레이를 통해 그는 황이 우리들을 방의 호위부대로 임명하였다는 것을 말해 주었디-. 그리고 우리는 그 대가로 한달에 각자쌀70깟떼이씩 받을수 있었다 우리들 각자는 조선 말로 이금과 나이, 출생 국가 그리고 왕을 호위하는 임무를  새긴 둥근 나무판(호패)을 받았는데 위에는 왕과 총사령관의 낙인이 새걱져 있었다. 그리고 소총(화승총)과 화약, 총알을 받고 신월(新月:초하루)과 만월(짠지:보름날) 때마다 그를 방분하여 경의를 표해야 하는 명령을 받았는데 왜냐하면 조선에서는 왕의 하급 관리가상급 관리에게, 그리고 대신들은 왕에게 한 달에 두 번 경의를 표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만일 총사령관이 왕의 임무 수행으로 길을 떠날 때에는 하급 병사들은그와동행해야만한다. 그는 매년 봄에 ,3개월 가을에 3개월 모두6개 월 동안 군사들을 훈련시킨다. 그 훈련은 마치 실전과 같았고 세상의 모든 짐이 그들의 어깨에 달려 있는 것 같았다. 이 기간동안 그들은 한달에 세 번 맹훈련을 받았고, 사격 연습을 받았다. 그 당시 많은중국 병사들이 왕의 호위부대로 있었기 때문에 그는 중국인 친위병 한 명과 벨떠프레이를 우리의 훈련친관으로 임명하여 조선식으로 우기에게 모든 것을 가그치게 하였다. 흐는 우기가 필요한 것을 갖추고 옷 제작비를 지불할수 있게 하기 위해 우리 각자에게 아마포 2필씩을 지급했다.

   우리는 매일 많은 고관들로부터 부름을 받았으며 그 이유는 그들과 부인들 그기고 아이들이 매우 신기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되았기 때문이었다 또 제주도 사람들이 우리 생김새가 사람보다는 괴물처럼 생겼다는 소문을 퍼뜨쳤기 때문이피도 했다. 우리가무언가를 마실 때는코를 귀 뒤에 돌린다는 말까지 있었다. 머리카락 색이 금발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사람보디-는 바다동물처럼 보인다는 말까지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자신들보다 신체적으로 더 좋은 몸을 가지고 있다고 생팍했는데,그 이유는 우리가 흰색 피부를 가졌으띠 그들은 그 피부색을 매우 좋아하였다. 사실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우리가 못생겼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우리의 힐 피부를부러워했다.

   처음에 우리는 필거리에 돌아다널 수 없었으며 구경꾼들 때문에 집에서도 휴식을 진혀 취할수가 없었다. 그러자총사령관은우리출 만나는 것을 금하였으며 그의 허락 없이는 어느 누구도 우리를 만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 집에 있던 하인들조차총사령관몰래 우리를불러내 놀려 댔기 때문이었다.

  8월에 따르떼르(Tarter:청나라사신)가 조공을 받으러 한양에 도착했다. 왕은 우리를 큰 성으로 보냈으며 따르떼르(청나라사신)가 돌아갈 때까지 우리는 그곳에서 생활했다. 이 성은한양에서 6~7마일 떨어진 아주높은 산에 자리잡고 있는데, 걸어서 2마일 정도 산을 올라가야 했다. 이 요새는 전쟁이 일어날 경우 왕의 피난처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매우 견고하였고, 유명한승려들도 이곳에 머물고 있었다. 그곳에는수천 명이 3년 동안 지낼 수 있을만큼의 식량이 저장되어 있었으며, 아주높은 영적 지도자들의 거주지로도 쓰였다. 요새의 이름은 남한산성으로 우리들은 9월 2일부터 청나라사신이 떠나는 9월 3일까지 머물렀다.

    11월 말이 되면서 날씨가추워지기 시작해 시오르(서울)에서 1마일 떨어져 있는 큰 강한강)이 얼었다. 얼음의 두께가 두꺼워 짐을 가득 실은말 200~300마리가한꺼번에 지나가도 끄떡없을 정도였다.

   12월 초로 접어들어 우리가 맹추위와 심한 기근에 시달리는 것을 총사령관이 보고 이같은 내용을왕에게 보고하였다. 그러자왕은 배가 제주도에 난파했을 때 떠밀려와 제주도에 건조중이던 가죽 등을 우리가 있는곳까지 가져오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 대부분이 썩었거나 좀먹은상태였다. 그는우리에게 이것들을 가지고추위를 피할수 있는 것은무엇이든 사도록 명하였다.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두세 사람이 같이 살 수 있는 집을 구입하기로 결정하였다. 왜냐하면 우리의 고약한 주인들은 우리로 하여금 매일 땔감을 구해오도록 잔소리를 하였으며,혹독한추위에서 몇 마일을오가며 땔감을구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던 우리로서는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 두세 사람은함께 집을사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하나님 외에 더 나은삶이 되리라는 아무런 희망도 없었고 그래서 우리는 이교 도들로부터 착취당하기보다는 추위를 견디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각자 은화 3~4따일(taijl)씩을 추렴하여 은화 8~9따일 혹은 28~30플로린(florin :당시 네덜란드 화폐 단위) 정도 하는 집들을 몇 채 샀다. 그리고 남은돈으로옷을사그곳에서 걱울을 지냈다

   1655년(청나라 사신 일행과 마주한 사견)

   1655년 3월 청나라사신 일행이 다시 한양으로 왔다. 우리는 이 기간동안 바깥출입을 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사신이 떠나려던 날,우리 일행 중 암스테르담출신 일등항해사헨드릭 얀스(Hendrik Janse)와 할렘(Haarlem) 출신 포수 헨드릭 얀스 보스(Hendik Janse Bos)가 장작이 다 떨어진 것처럼 행동하여 숲으로 갔다. 그들은 청나라사신이 지나가기로 되어 있던 길에 숨어 기다렸다. 수백 명의 기병과군졸들의 호위를 받으며 사신이 지나가자 그들은 초병선을 뚫고 들어가 사신이 탄 말머리를 붙잡았다. 그들은 조선 의복을 벗고 안에 입고 있던 네덜란드복장을보여주었다. 이 일은 엄청난소동을불러일으켰다.

   청나라 사신은 그들에게 누구인지 물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청나라 사신은 자신이 하룻밤 묵게 될 곳으로 항해사를 데려오라고 명하였다. 청나라 사신은 그를 호위하고 온 병사들에게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왕은즉시 벨떠프레이를그곳으로 보냈다.

   우리들또한왕궁으로끌려가 대신들 앞에 서게 되었다. 그들은우리에게 이 일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 물었다. 우리는 이 일에 대해 알지 못 한다고 대답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신들은 이 두 사람이 외출한  것을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우리를 처벌하였다. 판결은 각각 곤장 50대씩이었다. 보고를 받던 왕은 우리가폭풍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이지 도둑질이나 혹은 약탈을 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는 말과 함께 그 처벌을 승인하지 않았다. 왕은 우리를 숙소로 돌려보내고 그곳에서 다음 지시를 기다리라는 명을 내렸다.

항해사가 벨떠프레이와 함께 청나라 사신에게 가자 청나라 사신은 이런저런 일에 대해 물었다. 그러는동안 왕과 대신들은 청나라 사신에게 많은 돈을 뇌물로 주어 청나라 사신이 중국 황제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청나라 사신이 제주도에서 건져낸 총과 물건을 넘기라고 할까봐 걱정이 된 펏이다. 그 두 사람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즉시 감옥에 투옥되었다. 얼마 후 그들은 죽었다.그들은 항해사와 포수였는데 자연사였는지 처형을 당했는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감옥에 있는 동안 우리가 그들을 방문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들을 일어날 수도 있는 사건에 대비하여 통역하게 하려고 한 게 아닐 까?

6월에 청나라사신이 다시 한양으로 왔을 때 우리 모두는총사령관의 부름을 받았다. 그는 왕의 칙사이기 때문에 벨떠프레이를 통해 제주도에 다른 배가좌초되었는데 벨떠프레이가그곳까지 가기에는 너무 늙었다는구실로우리 중조선말을제일 잘구사하는사람세 명이 그곳에 가좌초된 배가 어떤 배인지 알아와야 한다고 말하였다. 2~3일 후 조수와 포수그리고 선원인 조선인 병졸을 안내인으로 하여 함께 떠났다.

  8월에 우리는 감옥에 갇힌 동료 두 명이 죽었다는 소식과 청나라 사신이 다시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삼엄한 감시를 받으며 집 안에 머물러야 했으며 2~3일 후 청나라 사신이 떠나기 전까지 바깥출입  을 할 경우 태형을 받을 수도 있다고 말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오기 전에 제주도로 떠났던 3명의 동료들로부터 편지를 건네받았는데, 그들은 본토 최남단에 있는 성에서 삼엄한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 편지에는 중국 황제가 조선의 속임수(우리의 존재를 슴긴 것)를 알아채고 우리를 요구할 겯우 관찰사는 자신들이 제주도를 향해 가던 중 좌초하여 죽었다는 편지를보내 우리의 존재를 숨기고 조선에 붙잡아 두기 위해 자신들을그곳으로보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연말이 되자 청나라 사신이 다시 조공을 요구하기 위해 얼어붙은 강을 건너왔다. 예전처림 왕은우리를 집 안에 감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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