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드릭 하멜의 표류기 (보고서)

이 표류기는 VOC의 Sperwer 호가 조선의 남해안인 켈파르트(제주도)해안에서 좌초된 8월 16일부터 선원 중 8명이 Coree (조선)에서 탈출하여 일본 Nangaskij (나가사끼)에 도착하기 까지의 선원들의 운명과 조선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난파선

평의회의 명령으로 우리는 1653년 6월 18일 스뻬르베르호를 (Sperwer) 타고 바따비아 (Batavia:자카르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있던 곳. 영어 식 발음은 바타비아)에서 포르모사 (Formosa:현재의 대만)로 항해를 하게 되 었다. 이 배에는 꼬르넬리스 께이사르(Cornelis Ceasar) 경이 함께 승선하 고 있었는데 포르모사 총독으로 있던 니꼴라스 페르뷔륵흐(Nicolaes Verburgh) 경을 대신하여 그곳총독으로부임하러 가는 길이었다.   

순조로운 항해 후 우리는 7월 16일에 따이완(Taijoan:대만)의 정박지에 도착하여 께이사르 경과 화물들을 그곳에 내려놓았다. 7월 30일 우리는 따이완때만) 총독과 평의회의 명령으로 다시 야빤(Iapan:일본)으로

출항하게 되었다. 순조로운 항해가 되길 하나님께 기도 드리며 항해를 시작하였다.

7월 마지막 날, 날씨는 매우 좋앗지만 저녁 무렵부터 포르모사에서 폭풍이 불어 왔고 밤이 되자 날씨는 더욱더 거칠어졌다.

(8월 1일 새벽에 우리는 조그마한 섬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해서든 섬 뒤편에 닻을 내릴 만한 장소를 찾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결국위험을무릅쓰고우리는닻을내리는데 성공하였다. 그섬 바로 뒤편에큰 암초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닻을 내린상태로 있어야만했으며, 바다는더욱더 거세어졌다.

이 섬은 선장이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배 뒤편에 있는 전망대의 창문을 통해 발견하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섬에 난파되어 배를 잃을수 있었을 것이다. 너무 어두웠기 때문에 나중에서야우리가그 당시 화승총(Musquet)사정거리1) 내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날씨가 개고 나서 보니 우리가 있는곳이 중국 해안근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완전 무장을한중국 군대가 해안을 따라 행진하는 것을보았다. 그들은우리가그곳에서 좌초되기를기대하는것 같아보였지만전지 전능한하나님의 도움으로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그날태풍은가라앉기는커녕 더욱심해졌으며,우리는그다음날까지 그곳에서 정박하였다.

8월 15일 바람은 더욱 세차게 불었고 엄청난 바람으로 우리는 갑판에서 서로의 말을 알아 들을 수 없었다. 더구나 배에 너무 많은 물이 들어와 우리는 물을 퍼내지 않으면 익사할 형편이었다. 게다가 높은 파도가 덮쳐와서 어느 순간에라도 배가 침몰할 것만 같았다. 어두워지자 집채만한 파도가 배의 뒷부분을 휩쓸었다. 배의 제1사장이 앞뒤로 심하게 흔들려서 우리는 전체 노를 잃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파괴된 부분을 복구하기 위해 모든 조처를 취했으나, 높은 파도로 배가 심하게 흔들려 실패했다. 배와 선원들, 화물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돛을 조금씩 내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 했고, 우리는 배를 파도 속에서 똑바로 떠있게 할 수 있었다. 선원들이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거대한 파도가 덮쳐와, 선원들을 활대에서 밀어 내고 배는 물로 가득차게 되었다. 
8월 3일 아침녘에 우리는 해류에 의해 20마일2)이나 떠밀려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시 포르모사해안을보게 된 우리는포르모사와중국사이로힐로를 정하였는데, 날씨는좋았고 미풍이 불었다.
8월 4일부터11열 바람이 세차게 불었고 변덕스러운 바람으로 인해 중국 해안과 포르 모사 해안 사이를 표류하였다.
8.월 11일 우리는남동쪽으로부터 비를동반한강한바람을다시 만나게 되어 동북 방향으로 항해했으며, 동북 방향에서 동쪽 방향으로 진로를 잡았다
8월 12일에서 14일 비를 동반한 거센 바람이 불어 날씨가 더욱 나빠져, 어떤 때는 항해가 가능했지만 또 어떤 때는 항해를 할 루가 없었다. 바다가 더욱 사나 워졌고 끊임없이 파도가 일어나 배가 더욱더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배에 물이 들어오기 시작하였지만 더 이상 아무런 대책을 세울수가 없었으며, 낯선 해안으로 떠밀려 가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그저 표 류할수밖에 없었다. 

제1사장(斜檣)을 받치고 있는 뱃머리의 신축을 장식한 범선은 화려했는데, 뱃머리는 앞 양쪽에서 이어져 나와서 높이 치솟아 있거나 장식을 달고 있었다. 스피글(거울)이라 불린 배 후미의 평평한 곳은 배가 소속된 도시의 문장관이나 배의 이름을 나타낸 돋을새김한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1:(하멜 보고)서에 자주 등장하는 '화승총 ·사정거리'는 학자들간에도 아직 여러 가지 견해가 있어 정확한 거리는  알수 없다. 학자들에 따라 120미터,100미터.210미터 등 의견이 분분하다.
2:.마일 철자는 영어와달라도 마일'이라고 발음한다. 지역에 따라 메일'로 발음하기도 한다. 당시 네덜란드와독일은같은 마일을 썼으며 1마일은 대략 7.4킬로미터 정도이다. 문제는 이 단위에 맞춰 계산했더니 하멜이 보고서에 쓴 길이가좀과장된 듯하다

8월 15일 바람이 너무 심하게 불어 갑판 위에서는 서로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어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다 작은 돛조차도 올릴 수 없었다. 배에는 다시 물이 더 많이 새어들기 시작해서 스며들어 오는물을 퍼내느라 매우 바빴다. 바다가 너무 사나웠고 때때로 거센 강풍을 맞았기 때문에 우리는 침몰하는 것 외엔 어떤 방법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거센 파도 때문에 배에 많은 물이 들어와서 우리는 침똘할 것이라는 생각밖에 하 지 않았다.

저녁 무렵이 되자 파도가 뱃머리를 쳤으며 그로 인해 유리창이 다 날라가고 제1사장(斜檣)3)이 부러져 나가 이물과고물4)을모두 잃을 위험에처했다. 우리는 전력을 다해 다시 고물을고정시키려 하였으나 배가 심하게 요동치고 높은 파도가 계속해서 밀려왔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괴 말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가고는 파도를

3. 제1사장 : 이물에서 앞으로 튀어나온돛대 모양의 둥근 나무
4.이물과 고물 : 배의 머리 쪽(이물)과 배의 뒤쪽(고물).
5. 선시계 : 배에서 선원이 사용하는 자체 시간.
6:바뎀(vadem) 길이 측정 단위. 영어의 파톰(fathom)게 래당하며 1바뎀은 대략 4피트 정도이다22 하멜 보고서

sperwerInDistress.jpg (21956 bytes)피하는 것 외엔 다른 방띱이 없는 것 같았으며, 앞돛대의 큰 돛을 약간올리는 것이 좋을 듯했다. 그래야만 위기에 처한 우리의 생명과 배와 회사의 물품을 가능하면 많이 구할 수 있고 어마어마한 파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도움 다음으로 최선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뒤쪽에서 파도가 덜쳐 앞 돛대의 큰 돛을 올리던 갑판 위의선원들은 거의 쉽쓸려 갈 뻔하였다. 배에 물이 가득 차자 선장은 선원들에게 소리쳤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자. 이런 파도가
두 번 정도 더 밀려오면 죽는 일 외에는 디 이상 건딜 수 있는 방법은 없다. " 두 번째 선시계(船時計)5) 의 두번째 시간쯤 되었을 때 밖을 쳐다보 던 사람이 소리쳤다. '육지다. 육지다!" 우리는 걱우 화승총 사정거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어둠과 폭우로 인해 육지를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노를 내친 다음 즉시 닻을 내렸다 그러나 파도와 수심 그리고 강한바람으로 인해 닻을 바닥에 고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 순간, 갑자기 배가 해안가에 세 번 정도 부딪히더니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하갑판 선실에 있던 사람들이 목숨을구하피 위해 갑판 위로 올라을 시간도 없었다. 갑판에 있던 사람들 중 몇몇은 배에서 뛰어내렸고 다른 몇몇은 파도 때문에 사방으로 휩쓸려 갔다. 해안에 닿은 사람은 15명뿐이었지만 대부분 알몸이었고 부상을 심하게 입었다. 처음엔 그들의 생명을 구할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바위 위에 앉아 있다 보니 난파선에 갇혀 있던 사람들의 신음소리가 차츰들렸다. 그러나 너무 어두워 아무도 발견할수 없었고 도울 수도 없었다.
8월 16일 아침녘,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은 다른 생존자가 있는지 찾아보기 위해 해안으로 갔다.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나타났다.
난파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36명이었으며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 중 대 부분은 부상 정도가 심하였다 우리는 난파선을 조사하다가 큰 갑판보 사이에 끼여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우리는 곧바로 그를 끄집어냈다. 그러나 그는 갑판보에 끼여 몸이 납작해져 있었기 때문에 3시간후 죽고 말았다. 15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그렇게 아름답던 배가 난파선으로 변하였고, 선원 64명 중 오로지 36명만이 살아 남았기 때문에 우리는 매우 낙담하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파도에 떠밀려온 시신이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우리는 해안을 수색하였다. 우리는바다에서 약 10~12바뎀6) 떨어진 곳에서 암스테르담출 신 선장인 레이니어 에흐베르스(Reijnier Egberse)가 한 팔을 머리 아래로 하고죽어 있는 것을발견했다. 우리는 여기저기에 죽어 흩어져 있는 다른 선원들 f~7명과함께 그를곧바로묻어 주었다.
  우리는 또한 파도에 떠밀려온 생필품이 해안가에 있는지 살펴보았다. 왜냐하면 악천후로 인해 요리사가 요리를 할 수 없어 지난 2~3일 동안우리는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걱우 밀가 루 한봉지와 고기와 베이컨이 조금 들어 있는 상자 하나, 그리고 포도 주 한 상자를 발견하였다. 포도주는 부상을 당한 사람들에게는 유익한 것이었다. 그순간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불이었다.
   우리는 사람들을 전혀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곳이 무인도라고 생각  하였다. 정오 무렵 비바람이 잦아들었다. 우리는 모두 비를 피하기 위  해 돛을 몇 개 이용하여 텐트를 만들었다.
8월 17열    우리는 맥이 빠진 채로 모여 앉아 사람들이 있는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는 일본사람이 나타나기를 바랐는데, 일본사람들이라면 우리를 다시 고향으로 보내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미 보트와 사장을 바치는 나무는 산산조각 나 있어 그것들로는 더 이상 항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외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정오가 조금 안 되어, 텐트에서 대포 사정거리쯤 떨어진 곳에서 우리는 한 사람을 발견하였다. 우리는 그에게 손짓을 했지만 그는 우리를 보자마자 달아나 버렸다. 정오가 조금 지난 후, 우리가 머무는 텐트에서 화승총 사정거리만큼 떨어져 있는 곳에서 세 사람이 다가왔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하는 행동과 손짓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결국 우리들중 한 명이 용기를 내어 그들에게 총을 겨누고 다가가 우리가 절실히 필요로 하던 불을 마침내 얻었다. 그들은 중국식 의상을 입고 있었지만 말총으로 만든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우리는 혹시 우리가 해적이나 추방된 중국인들이 거주하는 곳에 난파된 게 아닌지 무척 두려웠다. 저녁 무렵 무장한 사람들 100여 명이 텐트로 다가왔다. 그들은 우리 인원수를 세고 나더니 밤새도록 텐트 주위에서 우리 를감시하였다. 
8월 18일 아침우리는큰 텐트를 만드느라바빴다. 정오 무렵 1000~2000천 명에 이르는 기병과 병사들이 우리 주위로 다가왔다. 그들은 텐트주위에 군사들을 배치시켰다. 그런 후 서기, 일등항해사, 이등갑판장, 사환을 텐트에서 끌어내 화승총 사정거리에 떨어져 있던 지휘관에게 데려갔다. 그들 모두의 목에 쇠사슬을 감았는데, 그 쇠사슬 아래엔 큰 종이 매달려 있었다. 마치 네덜란드에서 양의 목에 매다는 종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들의 얼굴이 바닥을 향한 채 엎드린 자세로 사령관 앞에 내팽개쳐졌다. 그러자 병사들은 청천벽력 같은 큰 소리를 내질렀다. 텐트 주위와 안에 남아 있던 우리 동료들은그장면과소리를듣고선 서로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상급 선원들이 우리보다 먼저 끌려갔으니 우리 도곧끌려갈 것이다.'
      그들은잠시 동안 그렇게 있은후, 우리 선원들에게 무릎을꿇으라고 했다. 지휘관은 우리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였으나 우리는 그의 말을 알아들을수가 없었다. 우리는손짓 발짓을해가며 야빤(일본)에 있는낭가사께이(나가사키)로 가고 싶다고 이야기하려 하였다. 그러나 모든 것   이 허사였다. 왜냐하면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그들은 야빤(일본)을 예나리(Ieenare)혹은 이어뽕(Ierpon)으로 불렀기 때문에 야빤이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지휘관은우리에게 술한잔 씩을 따르게 하고선 우리를 다시 텐트로 되돌려보냈다.
       우리를 호위하던 군사들은 우리 텐트에 먹을 것이 있는지 확인하려  했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거라곤 위에서 언급한 고기와 베이컨뿐이라는 것을 알고 곧장 이것을 지휘관에게 보고하였다. 한 시간쯤 지난후, 그들은 우리에게 쌀죽(3aH을 조금 가져다 주었다. 우리가 너무 굶주렸기 때문에 먹을 것을 갑자기 많이 주면 무슨 탈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정오가 지나자 그들은 각각 손에 밧줄을 가지고 나타났고 우리는 그것을보고 겁에 질렸다. 왜냐하면 우리를 밧줄로 단단히 묶어 죽이려고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해안가에서 여전히 쓸 만한 것을 건져올리기 위해 큰 소리로 떠들어 대면서 난파선 쪽으로 걸어갔다.
    저녁 무렵 다시 그들은 우리가 먹을 밥을 조금 가져다 주었다. 그날 오후 항해사는 위도를 측정하여 우리가북위 33도 32분에 위치한 ?빠에르츠(제주I)에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8월 19일    그들은 표류물들을 육지로 옮기고 그것들을 햇볕에 말리기 위해 바삐 움직였으며, 쇠붙이가 있는목재를불에 태우느라분주하였다. 상급 선원들은 지휘관7)과그곳에 함께 와 있던 제독8)에게 다가가서 그들에게 망원경을 주었다. 그들은 또한포도주와 바위틈에서 발견한 회사의 은 술잔을함께 가지고 갔다 그들은 포도주 맛을보더니 맛있었던지 아주 많이 마셨고 대단히 행복해 하며 우리의 상급 선원들을 다시 텐트로 돌려보냈다. 그 이후 그들은 상급 선원들에게 깊은 우호감을 나타냈으며 은술잔도 되돌려주었다 

7 여기서 말하는 지위관은 당시의 대정현감 권주중이다.
8. 당시 제주목 판관노정을 가리킨다

8월 20일 그들은 쇠붙이를 얻기 위해 난파선과 나머지 목재를 불태웠다 그러던 중 화약이 장전되어 있던 대포 탄알 두 개가 터졌다. 그러자 지휘관 뿐만 아니라 군졸들도 도망을 쳤다. 잠시 후 우리에게 오더니 또 폭발할 것이 있는지 손짓 발짓을 해가며 물었다. 우리는 그링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들은 자신들이 하던 일을 계속하였으며 하루에 두 번씩 우리에게 먹을 것을갖다주었다.
8월 21일 아침에 우두머리는 우리에게 와서 몇 사람을부르더니, 텐트 안에 있던 우리 물건들을봉인해야 한다며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하였고 우리가보는 앞에서 그것들은즉시 봉인되었다. 우리가 앉아 있는 동안 몇 명의 도둑(약탈자)들을 자기에게 데려오게 하였다. 난파선 물품을 인양할때 모피, 철제류 그리고그 외 물품을훔친 자들이었다. 그들은 훔친 물품들을 등에 지고 있었다. 그들은 모든 물품을보관할 것이라는 징표로 우리가보는 앞에서 그들을 처벌하였다. 그들은 길이는 약 1바뎀 쯤 되고, 굵기는 보통아이 팔뚝만한막대기로 각각30대에서 40대씩 발바닥을맞았는데, 그중 몇몇은발가락이 떨어져 나갔다.
   정오 무렵 그들은 우리가 떠나야만 한다고 알렸다. 말을 탈 수 있는 사람에겐 말이 주어졌고, 부상 때문에 말을 탈 수 없는 사람은 지휘관의 명령으로 들것에 실렸다. 정오가 지날 무렵 기병과 보병들의 엄한 호위를 받으며 출발하였다. 저녁 무렵 우리는 따장(Tadjang: 대정)이라는   작은 마을에 머물렀다.
음식을 약간 먹고 난 후 그들은 우리 모두가 잠을 잘 수 있는 집으로  데려갔는데, 그곳은 여관이나 숙소라기보다는 마구간같이 보였다우리는 약4마일 정도를 여행하였다.
8월 22 일 아침 무렵 우리는 다시 말을 타고 요새를 향해 가다가 아츰을 먹었다. 그곳에는 전함두 대가 있었다. 오후에 우리는목관(Moggan: 牧官 제주목)9) 이라는 도시에 도착하였으며, 그곳은 그 섬을 다스리는 목사의관저가 있는곳으로, 그들은주지사를목소(Mocxo:목사)라고불렀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하자 그들은 우리를 관청 앞마당으로 데려갔다. 그들은우리 모두에게 마실 수 있는죽을주었다. 우리는 이것이 우리가마시는 마지막음식이며 우리가곧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무기와복장이 소름 끼칠 정도로 무섭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곳에는무장한 병사약3000명이 중국혹은 일본식 의상을 입고서 있었는데,우리는그러한사람들을전혀 보지도듣지도못했었다.
앞에서 언급한 세 사람과 회계사가 앞에서 언급한 방법으로 목사 앞으로 끌려가땅을 보며 꿇어앉아 있게 되었다. 잠시 후, 그는우리를관아의 큰 대청 위로 올라오라는 듯이 고함을 치며 손짓을 하였다. 그는 마치 왕처럼 그곳에 앉아서 우리에게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 묻는 것 같았다. 우리는 예전처럼 손짓과발짓을 해가며 야빤(일본)에 있는 낭가사께이(나가사키)로 가고자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또한그 네 사람과동일한방법으로 그 목사 앞으로 끌려가서는 심문을 받았다. 우리는 가능한모든수단을 이용하여 우리의 뜻을 전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전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서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우리 모두를 어떤 집으로 가게 하였는데, 그곳은 왕의 숙부가 평생 동안유배되어 생활하다가숨질 때까지 지낸 곳이었다. 그가 이곳에 유배된 이유는 왕의 자리를 찬탈하려다가 왕가에서 쫓겨나 온 것이었다.

현대 영어나 네덜란드어에서 '추가물'이란 다른 모든 것들 말하는데, 하멜은 고기나 생선 등, 주로 주식을 의미했다. 
9. '목' 은 행정 단위를 나타낸다 목관은 그 관아를 말하며, 목사르는 牧官 행정 지화관을 의미한다.
10. 깟떼이(katti): 무게의 단위로1깟떼이는 약625그램. 따라서 3/4깟떼이는 대략468그램

   목사는우리가 머무는곳을삼엄하게 경계하였으며, 우리에게 약3/4깟떼익10)의 쌀과 그 정도의 밀가루를 매일 주었다. 그러나 반찬은 거의 지급되지 않았으며, 우리는 또한 그것을 먹을 수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식사하는 동안 반찬 대신 소금을 이용해야 했으며 약간의 물을타서 마셨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목사는 선하고 이해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일흔 살 정도의 그는 한양 출신이었으며, 조정에서도 상당한 신망을 받고 있었다. 그는 왕에게 우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명령을 기다리기 위해 서신을보내겠다고 했다. 그곳에서 신속한왕의 대답을 기대한다는 것은 힘들었다. 왜냐하면 바다로 12~13마일을 거쳐육지로 약 70마일을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목사에게 이따금씩 약간의 육류와 다른 반찬을 줄 수 있는지를 알아보았다. 더이상소금과쌀만으로는 지탱할수 없기 때문이었다. 또한우리는 가끔 씩 외출할 것을 요청했고, 몸을 씻고 약간의 옷을 빨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그는 매일 교대로 6명씩 외출할 수 있게허락했으며, 반찬도 지급했다.
그는우리에 관한 것들을 그들의 언어로 질문을 하고 기록하기 위해 우리를 자주 불렀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알게 되었 고 매우 서툰 말이었지만 서로 대화할 수 있었다. 목사는 우리에게 향연과 오락을 fl풀기도 했으며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슬픔을 느끼지 않았고, 왕의 서신이 도착하는 대로 우리를 다시 야1빤일본)으로 보낼 것이라는 말로 매일 우리에게 용기를 주었으며 부상자들을 치료해 주었고, 기독교인들이 부끄러워할 정도로 이교도들은 우리를 극진히 대해 주었다.
10월 29일 정오가조금 지난후, 목사는 서기와 일등항해사그리고 이발사와조수를불렀다. 우리가목사에게 갔을 때, 붉은색을 띤 긴 수염을가진 어떤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 목사는 우리에게 이 사람이 누구인지 물었고, 우리는그가우리와같은 네덜란드사람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목사는 웃기 시작하였는데, 그 사람이 조선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 같았다.
우리가 서로 손짓 발짓으로 많은 이야기를할 때까지 조용히 있던 그 사람은, 서툰 네덜란드 말로우리가 어느 나라사람이며 어디에서 왔는 지 물었다. 우리는 그에게 암스테르담에서 온 네덜란드 사람이라고 대 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중이었는 지 물었다. 그래서 우리는 따이왑대민에서 출발하여 야빤(일본)으로 가는 중이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항해를 막았다고 대답하다. 5일 동안 계속된 폭풍우로 우리는 이 섬에 표류하게 되었고 지금은 관대한 조처를 기대하고 있다고 대답하였다.
우리는 그에게 이름이 무엇이며 어느 나라 사람이며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그는 대답하길, 이름이 얀 얀스 벨떠 프레(Jan Janse Weltevree:박연)이며 더 레이프(De Rijp) 출신이라고 대답하였다. 1626년 네덜란드에서 홀란디아(Hollandia) 호를 타고 이곳에도착하였고, 1627년 더 아우버께르크(De Ouwerkerk:구교회라는뜻)호를 타고 야빤(일본)으로 가던 중 역풍을 맞아 조선 해안으로 밀려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이 필요해 보트를 타고 육지로 갔다가 그곳에 살던 주민들에게 세 사람이 붙잡혔는데, 나머지 사람들은 보트를 타고 도망갔으며 배도 곧 떠나 버렸다고 대답하였다. 또 그들중 두 사람은 17~18년후 청나라에 의한 침략 전쟁에서 사망했다고 말했다. 그 두 사람은 더레이프 출신의 디르크 헤이스베르즌(Dirk Gijsberszn)과 암스테르담 출신 의 삐떠르스 베르바스트(Pieterse Verbaest)로, 그들은 벨떠프레이와함께 조선에 도착한 사람들이었다.
우리 일행은 또 그에게 어디에 살고 있으며 무엇을 하고 이 섬에 왜오게 되었는지 물었다. 그러자 벨떠프레이는 서울에 살고 있으며 왕으로부터 상당한 양의 식량과 의복을 받고 있고, 우리가 어느 나라 사람이며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를 조사하기 위해 보내졌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여러 차례 왕에게 자신을 일본으로 보내줄 것을 청하였으나 왕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왕은 우리가새라면 일본으로 날아갈수 있지만 어떠한 외국인도 이 땅에서 내보낼 수 없다고 말하였으며. 왕이 돈과 의복을 내려줄 것이며 그렇게 이 땅에서 일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우리에게 그것을 자랑하려는 것 같았다. 또한 우리가 왕 앞에 가더라도 기대할 것이 전혀 없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통역을 구했다는 기쁨이 곧바로  슬픔으로 바픽었다. 벨떠프레이의 나이는 약 i7세에서 58세 정도 되어 보였고 모국어를 많이 잊어버렸기 때문에 처음에 우리는 그의 말을 거의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 달이 지나자 그는 다시 모국어를 되찾게 되었다.
목사의 명령으로 앞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자세히 기록되었으며 벨떠프레이는 그것을통역하여 우리에게 읽어 주었다. 그것은 다음 순풍이 불 때 조정으로 보내기 위한 것이었다. 목사는 답신이 첫 배로 도착할 예정이라고 매일 우리에게 이야기하면서 용기를 주었다. 우리는 그답신 내용이 우리가 일본으로 떠나도 좋다라는 내용이 되길 바랐고 그것에 우리의 운명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우리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벨떠프레이와 상급 감독관을 매일 우리에게 보냈다.
12월 초, 전임 목사의 3년 임기가끝났기 때문에 새로운목사가부임 하였다. 이 일로 우리는 매우 낙담했다. 왜냐하면 새로운 목사의 부임이 새로운 법을 의미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걱정은 현실로 되었다. 날씨는추워지기 시작하였고 우리는 입을옷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전임 목사는우리 모두에게 가죽으로 만든 양말한 켤레 와 신발을 만들어 주어서 그것으로 추위를 견딜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압수했던 책들을 다시 우리에게 넘걱주었으며 걱울을 보낼 수 있도록 큰 통 가득히 기름을 갖다주었다.
송별연에서 그는 우리를 융숭하게 대접했으며 벨떠프레이로 하여금 통역을 하게 하여 우리를 일본으로 보내 주지 못한 점과 같이 본토로 가지 못한 점에 대해 매우유감스럽다고 말하였다 우리는그가 떠나는 것에 대해 너무 슬퍼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조정에 가는 즉시 우리를 석방시키거나 가능한 한 빨리 우리를 조정으로 불러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가 베푼호의에 대해 감사를표하였다. 신임 목사가부임하자마자우리는 더 이상부식을 지급받지 못했으며 대부분의 식사는소금이 들어간쌀과물이었다.
 역풍 때문에 아직 섬에 남아 있던 전임 목사에게 우리는 불만을토로 하였지만 목사 임기가 끝났기 때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다는 답변을들었다. 그러나불만을 없애기 위해 그는 신임 목사에게 서신을 보냈고, 우리는 그가 섬에 있는 동안 몇 가지 새로운 부식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1654년 1월 초 전임 목사가 떠나자 상황은 악화되었다. 신임 목사는 우리에게 쌀 대신 보리와보릿가루를주었으며 부식은 제공되지 않았다. 우리는부식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보리를 팔았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보릿가루 3/4깟떼이에 만족해야만 했다. 그러나 매일 여섯 명씩 함께 외출은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의기소침한 채 도망칠 다양한 방법을 찾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수확기였고 우기가 다     가왔고 시간이 꽤 지랐는데도 왕으로부터 답신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섬에서 죽을 때까지 죄수로 생을 마감해야 할 것 같은 두려움이 생겼다. 그래서 우리는 탈출할 방법을 모색했다. 필요한 모든 장비를 실은 배가 밤중에 부두에 오면 그 배를 타고 달아나려고 했다.
4월 말 기회가왔다. 그래서 일등항해사와 선원 3명을 포함한 6명이 탈출을 시도하였다. 일행 중 한 명이 배의 상태와 밀물·썰물을 점검하기 위해 담을 넘어야만 했다 개가 짖었기 때문인지 경비가 너무 삼엄해져 되돌아와야만했다.
5월 초항해사는자신이 외출할차례가오자 다른 선원 5명과함께(그중 3명은 이전 탈출 시도에 참여하였음) 시 근처에 있던 조그마한 마을에서 장비가 갖추어져 있고 사람이 타고 있지 않은 작은 배 한 척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즉시 한사람을숙소로 보내 각자에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준비해 둔) 빵 두 조각과 꼰 밧줄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들은 다시 배로 돌아와 각자 물 한모금을 마시고 다른 아무것도 갖지 않은 채 배에 을랐다. 그들은그 배를모래톱위로끌고 갔다. 그곳에 있던 마을사람 몇몇은 무엇을 어떻게 할지 몰라 놀라서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한 사람이 집으로 들어가 화승총을 들고 배에 탄 사람들을 쫓아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그들은 바다 한가운데 있었고 배의 밧줄을풀어 돛을 올렸지만장비를잘다루지 못했기 때문에 돛대가갑판 위로 떨어졌다.
온갖노력을 다하여 다시 돛을높이 올릴 수 있었다. 그들중 배에 타지 못한 사람만이 다시 해안으로 돌아왔다.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꼰 밧줄을 가지고 돛대와 돛대가름대를 고정시켰다. 그러나 돛대가 부러져 돛을 단 채로 다시 갑판 위로 떨어졌다 그들은돛대를 다시 위로올릴 수 없었기 때문에 배가 해안으로 밀려왔다.
이 광경을 지컥본 마을 사람들은즉시 다른 배를 타고 그들을 뒤쫓았다. 배가 다가오자 선원들은 그 배로 뛰어 올라탔다. 그 배에 타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을 바다에 던져 버리고 그 배로 계속 항해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배에는물이 가득 차 더 이상항 해할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다시 해안가로 되돌아갔다.
그들은 목사 앞으로 끌려갔다. 목사는 그들 몸에 칼(두꺼운 널빤지)을 씌우고 쇠사슬로 단단하게 묶었다. 한 손은 족쇄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들은목사 앞에 꿇어앉았다. 숙소에 갇혀 있던 다른 선원들도 끌려나왔다 그들 또한 포박을 당한 채 목사 앞으로 인도되었다. 그곳에서 우리는동료들이 비참한모습으로 있는 것을보았다 목사는 그들에게 이일을 다른사람들도 알고 있었는지 물었다. 그들은 다른사람들의 부담을 줄이고 형벌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 몰래 이 일을 하게 되었다고 대답하였다 목사는 선원들에게 왜 그랬는지 물었다. 선원들이 일본으로 가려 했다고 대답하자목사는 그들에게 물과 식량도 없이 이 작은 배로 무엇을 할수 있었겠냐고 물었다. 그들은 서서히 고통받는 것보다는 빨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대답했다.
목사는 그들을 풀어 주더니, 길이 약 1바뎀 정도에 넓이가 손바닥만 하고 두께는 손가락만한 곤장으로 각기 태형 25대를 내렸다. 그 때문에 그들은 한 달 동안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게다가 외출이 금지 되고 밤낮으로 삼엄한 감시를 받아야 했다.
이 섬을 그곳 사람들은 쓰겔루(Scheluo: 제주도)라고 불렀으며 우리는꿸빠에르츠(Quelpaert)라고 불렀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섬은 북위 33도 32분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꼬레이(Coree: 조선) 남부에서 12~13마일 떨어진 곳이다. 북쪽에는 본토로 항해할 수 있는 항만이 있다. 그곳에는 보이지 않는 절벽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곳 지형을 모르는 사람이 항해하기에는 매우 위험하다.
피난할 수 있는 항구나 닻을 내릴 곳이 없었기 때문에 그 만을 놓치고 지나가면 결국 일본으로 쉽게 표류할 수 있었다. 섬은 무수히 많은 보이는 펄벽과 안보이는 절벽들, 암초들로 둘라뼈 있고 많은사람들이 거주하고 곡물이 풍부하였으며, 말과 소가 많았다. 그 중 많은 양이 매년 왕에게 공물로 바쳐졌다.
주민들은 본토 사람들에게 천대받았으며,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나무가 우거진 높은 산이 하나 있고, 특히 나무가 없는 계곡이 많은 낮은 민둥산들이 있었고 그곳에서 사람들은 벼를 재 배한다.
5월 말, 왕으로부터 오랫동안 기다렸던 서신이 왔다. 섬에서 달갑지 않은 체류를 끝마칠 수 있어서 한편으희는 기뻤으나 조정에 가야 한다는 슬픔을 안걱 주었다. 6~7일 후 우리는 한손과 양 발이 기둥에 묶인 채 전함 네 대에 나눠 태워졌다. 우리를 감시해야 할 병사가 배멀미를 하였기 때문에, 만약우리가풀려 있다면 항해하는동안 배에서 도망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한 것 같았다.
이틀동안그렇게 앉아 있은후바람이 좋지 않아우리는 배에서 풀려나 갇혀 있던 숙소로 다시 되돌아왔다. 4~f일 후에 바람이 오른쪽에서  불어와 날이 밝기 전에 우리는 다시 전함에 태워져 예전처럼 단단히 묶여 감시되었다. 닻이 오르고 항해가 시작되었다. 그날 저녁 무렵 우리는본토에 도착하여 닻을 내렸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배에서 내려 해안가로 끌려갔다. 우리는 그곳에서 병졸들의 삼엄한 감시를 받았다. 그 다음날 우리는 말을 타고 헤이남(Heijnam: 해남)이라는곳에 도착하여 저녁 무렵 각각의 배가다른장소에 정박했던 우리 일행 36명이 모두 모였다. 다음날 우리는 음식을 먹고 다시 말을 탔다. 저녁 무렵 우리는 여삼(Ieham:영암)이라는 곳에 도착 하였다 그날밤에 포수였던 ?르머렌트(Purmerend)출신의 빠울루스 얀스 꼬울(Paulus Janse Cool)이 사망했는데, 그는 배가 난파된 후부터 계속 아팠었다. 여삼(f:암)군수의 명령으로 우리가 보는 앞에서 땅에 매장되었고, 장례가 끝난 뒤 우리는 다시 말을 타고 출발하여 저녁 무렵 나에주(Naedjoo:나주)라는 고을에 도착하였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다시 길을 떠나 그날 저녁 산시앙(Sansiangh:장성)이라는 고을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시 아침에 출발하였다. 그날 밤우리는 ??(Tiongop:정읍)이라는 고을에서 머물렀다. 그날 낮 우리는 잎암산시양(Iipamsansiang:입암산성)이라는 성이 있는 매우 높은 산을 지나갔다. 그 고을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아침에 다시 길을 떠나 같은 날 떼인(Teijn:때인이라는고을에 도착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다시 말을타고 길을 떠나 정오무렵 꿈게(Kumge:금구)에 도착했다. 점심을 먹고 다시 길을 떠나 저녁에는 고대에 왕궁이있던 쪘씨요(Chentio:전주)에 도착했다. 현재는 ?라도(Thiollado:전라도)관찰사가 거주하는 곳이며 전국적인 상업의 중심지로 여걱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이곳이 바닷길로는 올 수 없는 내륙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다시 길을 떠나 저녁에는 여산(Iesaen:여산)에 도착했는데 이곳이 썰라도(전라도)의 마지막도시였다.
아침에 다시 말을타고출발해서 그날밤에는근진(Gunjin진)이라는 쳔샹도(Tiongsiangdo:충청도)의 작은 고을에서 보냈다.
다음날 다시 연산(Iensaen:연산)이라는 도시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아침 다시 말을 타고 저녁에는 쳔샹도(충청도)의 관찰사가 있는 꽁씨오(Congtio:전주)라는 도시 에 도착했다.다음날 우리는 큰 강을 건너 왕이 머무르는 도시가 있는 셍가도 (Senggado:경기도)로 들어갔다.

하멜은 잘 I와 J를 섞어썼다. 그러므로 밑에 언급된 이름들은 J 또는 I로 읽을 수 있다. 

조선시대 서울(한양)에서 공주에 이른 길은 다음과 같다. :(단위는 리, 10리는 약 4Km), [현재이름]경사[서울] 동작진(10) 과천(20) 갈산(10) 미륵당(20) 화성[수원] (10) 류천(5) 중조(25) 청호역(30) 진위(8) 소사(30) 성환역(20) 천안 (40) 금계역(18) 덕평(10) 차령(15) 광회창(20) 모로원 (25) 공주
(* 서유구, <<예규지>> <<임원경제지 >> 5, 서울 보경문화사 1983) 

좀더 자세한 내용:
경사- 동작진(12) 승방평 (4) 남태령(7) 과천(7) 인덕원(8) 갈산점(3) 사현평 (9) 지지대(5) 수원(15) 하류천 (15) 충뱀현(15) 오산점(8) 진위 (12) 태백치(10) 갈원(8) 가천 (2) 소사점(10) 아교(3) 홍경비(7) 송환옥(10) 수갈원(5) 직산(5) 병장승우(7) 이토리(13) 천안 (10) 삼거리(5) 금제역(15) 독평점(10) 원기(10) 차령 (5) 인제원(5) 광정역(5) 궁원 (10) 모룽원 * 서유구, <<예규지>>: <<임원경제지 >> 5, 서울:보경 문화사 
(** 김정호 <<대동지지>>, 서울 아세아 문화사 1976)

자료를 주신 백승종 박사님께 감사드립니다. [Seminar fuer Sinologie und Koreanistik der Universitaet Tuebingen Wilhelmstr. 133 D-72074 Tuebingen Germ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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