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한국)의 발견

조선의 존재를 처음으로 안 유럽인은 포르투칼인 이었다. 1543년 이래, 그들은 히라도섬에 무역항을 두고 있었고, 쓰시마섬을 가로지른 북서쪽에 그들이 '코레이'라 부르는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포르투칼에서, 그리고 포르투칼 상선에서 조사하는 동안 Jan Huyghen van Linschoten은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1592년에 출판된 그의 Reisgheschrift (항해일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soo streckt de Custe (van Japan) weder nae het noorden toe, wijckende daer nae inwaerts, noordwestwaerts aen, aen welcke Custe comen die van Japon traffijcken met het Volck van de contreije diemen noemt Cooraij, waer van ick goede, breede en waerachtige informatie hebbe, als oock van de van de Navigatie naer dit Landt toe, van de Piloten die 'taldaer' ondersocht ende bevaren hebben.
  (번역)..일본해안에서 북쪽으로 뻗어있는 항로를 벗어나면 북서쪽에 일본과 교역을 하는 코레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나는 일찍이 이 나라로 항해했음은 물론 그곳 상황을 조사하고 항해한 사람들(그는 이들을 조종사들이라 부름)로부터 코레이에 대한 확실 하고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일 년후에 발행된 Itinerario , 37쪽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를 볼 수 있다. 
 
 

  Een weinig boven Iapon, op 34 ende 35 graden, niet verre van de Custe van China, legt een ander groot Eijlandt, ghenaemt Insula de Core, van welcke tot noch toe gheen seker bescheidt en is van grootte, 'tVolck, noch wat waren daer vallen
  (번역) 일본에서 조금 위쪽인 위도 34도에서 35도에 중국해와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코레(Insula de Core)라 불리는 또 다른 큰 섬이 있는데 지금까지 크기나 인구, 어떤 교역이 있는지에 관해 확실한 게 아무 것도 없다. 

조선은 포르투칼인들에게 알려져 있었고 그들을 통해 네덜란드에도 알려져 있었는데 이 당시 일본은 조선과 교역을 하면서 쓰시마의 군주(일본어로는 다이모)는 무역의 독점권을 쥐고 있었다. 
같은 해인 1609년 네덜란드는 일본정부로부 터 히라도섬에 공장을 세워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고 공장의 책임자인 Jacques Specx는 조선과 교역을 위해 후추를 실은 배를 쓰시마섬으로 보냈으나 군주는 이를 히라도로 돌려 보냈다. 

총독이 보낸 편지는 물론 멀리 헤이그에서 국왕이 1610년 12월 18일에 보낸 '일본의 전능한 황제이자 국왕에게'란 제목의 서신도 일본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는데, 여기서 마우리츠국왕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Voorts alzoo mijne onderdanen genegen zijn om alle landen en plaatsen met handeling in vriendschap en sincerelijck te bezoeken, zoo verzoeke ook aen Uw Keiz. Majesteit dat dezelfde handel op Corea door Uwer Majesteits faveur en behulp mogen genieten.
  앞으로 더욱 나의 국민들이 모든 나라를 방문하여 교역을 하고자 하니, 코레아에서도 동등한 교역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이렇게 온갖 미사여구를 사용했으나 일본 국왕은 이를 무시했다. VOC에게는 그들과 동떨어진 조선과의 독점 무역권을 차지하기란 힘든 것이었으나 그들은 이 상황을 계속해서 변화시켰다. 1622년 VOC의 상선 de Hond 호는 공식적으로는 항해 오류였다고 하나 실제로는 고의로 조선 해협으로 항해한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de Hond 호는 대포, 화승총, 활과 수많은 목창 등 적어도 36가지의 전쟁 무기로 즉시 공격받았다. 

환영받지 못한 접대에 관한 보고서에서 선장은 바타비아에 있는 관계 당국에게 'alle schippers te waarschouwen ende te belasten wel op haer hoede voor soodanighe resconters te wesen' ( 모든 선장들은 달갑지 않은 이런 충돌에 각별히 주의 할 것 )을 충고하고 있다.

그러나 행정관은 모든 희망을 포기하진 않았다. 1636년 사령관 퀘스트는 het landt Coree t' ontdecken '(조선으로 항해하라)라는 임무를 받았다. 그러나 심지어 조선이 눈앞에 보였으나 호송함(艦)은 조선 전함대에 의해 방해받기에 이르렀다. 짧은 군함 고위 선원 위원회가 있고 난후 퀘스트 사령관은 조선땅에 발을 딛으려는 더 이상의 시도를 포기하고 항로를 되돌리기로 결심한다.
 
 

조선의 '발견자들'라 불린 명예를 가진 이는 1653년 8월 15일 난파된 스페러(새매)호에서 살아남은 선원이었다. 
1653년 4월 말 대만총독 Nicolaes Verburgh는 사임을 표명했다. 그는 재직 기간중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에(약한 사령관이었다) 그의 사임은 받아 들여졌다. 대만에 사령관들을 배치한 이유는 공식문서에서 비싼 지역이라 불려진 것처럼 비상한 지혜와 신중함, 그리고 대담성을 지닌 새로운 소유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벨테브레 (Weltevree)는 사실 발견자라는 칭호를 받을 자격이 없다. 그는 그의 동료들과 최초로 조선땅에 닿았으나 결코 돌아오지 못했다. 

요트그림. 17세기 VOC가 동남아시아에서 몇몇 식민지와 교류유지를 위해 사용한것. 에칭-Cornelis Visscher de Jonge (1629-1658)作

모든 시선은 전에 대만의 고문으로 있었던 Carel Hartsingh에 집중 되고 있었다. 그러나 1653년 4월 18일 총독인 Carel Hartsingh이 갑자기 사망하여 Hartsingh는 Joan Maetsuycker이 새 총독자리를 이어 받기를 바랬으나,결과적으로 Cornelis Caesar가 고문으로 임명 되었다. 부임을 위해 Caesar는 6월 16일 Sperwer 호에 올랐고 Joan Maetsuycker는 떠나는 사령관을 위해 만찬을 베풀었다. 다음날 그는 가족과 함께 Sperwer 호에 몸을 실었다. 대만으로 향하는 배에는 Zeelandia 요새의 인원을 채우기 위해 50명의 군사들이 수용되었다. 

1653년 6월 18일 스페러호는 닻을 올리고 대만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하멜로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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