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부함과 불편함

or

부(富)가 사람을 행복하게 하진 않는다

돈에대한 애착은 모든악의 근원이란 옛말이있다. 그러나 혹자는 돈에는 냄새가 없다고 한다. 또한 예민하게 다루어야할 문제이기도 하다. Amsterdam, Hoorn, Enkhuizend에 있는 VOC건물의 벽돌이 아니더라도 다른 어딘가에서 선실 항해사의 땀냄새나 동인도 열도에서 토벌원정대들의 희생의 피냄새가 날 것이기 때문이다.

VOC의 고수익은 앞서 예기했듯이, 회사 직원들과현지인들의 희생으로 얻은 것이었다. 상관에게 있어서 이익추구는 그들의 가장중요한 동기였다. 다른곳에서 도덕적 고려는 없었고, 사실에 대해서만 자신들을 한정할 수 있다는 소위 네델란드식 무역기풍이라는 것과 칼뱅주의적 생활방식간의 관계에 대해 기술했다. (그러나 van Hove는 미래에 대해 점치듯이 판단 한다. 또한 어떤 작가들은 인용해서 판단한다.).

한가지 사실은 8년간의 긴 독립전쟁의 후반이 VOC에 의한 자금조달에 의한 것이었기에 Holland의 존재는 이 상업기업 때문이라고 한다. 그 문화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총독의 가족들이 VOC로 많은 돈을 모으지 못했더라면, 화가나 건축가에게 많은 일자리를 줄 수 없었을 것이다. Dam에 있는 궁전은 물론 Amsterdam을 따라 있는 대부분의 저택도 지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Max Havelaar (1860)는 풍자적으로 묘사했다. 이는 다른 어떤 것보다 과학적이다. : Wirtschaft und Geselschaft (1922) Max Weber) Weber에 따르면 , 칼뱅주의는 검소와 부지런함과 같은 미덕을 창시했다. 나태함은 게으른 사람에게 악마의 안락함 이었고, 낭비와 소비는 끝나지 않았다.이러한 노동풍조가 몇몇 힘있는 무역 거물들의 발상지에 머물러 있었다.

전체주의의 승리로 (판단컨데 사실은 아니지만, 스페인은 그들의 역사를 다르게 해석한다.) 스페인 지도자는 자유사조를 최우선으로 창출했다. 모든 종류의 이견은 책으로 나올 수 있었고 Erasmus 와 Coornhert의 정신속에 철학적 사조가 발달했다.

이와는 매우 대조적으로 VOC의 활동에 대한 이득으로 동인도 열도의 현지인들이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실리주의 관념아래 그들은 착취당했고 공화정체에서 발달한 철학적 이념도 무시당했다.

VOC의 높은지위에 있던 몇몇은 이러한 철학적 발전을 알고 있었다. Joan Maetsuyker 총독같은 학식있는 이는 1662에 출간된 Baruch Spinoza의 저서 Tractatus de Intellectus Emandatione 을 읽은 것 같다. 그는 그 책에 언급된 "물질적인 이득은 이득이 아니며 가치를 지니고 평온한 즐거움을 주는 것만이 유일하며 신이주신 창조물에 대한 사랑이다." 라는 말에 감탄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이러한 생각으론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이런 생각을 인도 총독보좌기관에서 다룰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VOC는 물질적인 이득이 목표 이고 존재의 이유였기 때문이다.

철학적인 이론과 상업적인 실용성 사이의 이런 부조화는 황금시대에 Holland에서 더 교육받은 상인들에게는 전형적인 것이었다. 혹자는 Simon Schama의 the Embarrassment of Riches(네델란드에서는 1988년에 Overvloed en welbehagen 이란 제목으로 변역 출간)이란 책을 읽었을 것이다.

그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몇몇 부자 Hollanders 들은 사후에 가난한 사람을 위한 집을 짓고 유지하는데 그들 재산의 일부를 내놓아야 한다는 조항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네델란드 도시들중 독신녀들이 무료 혹은 적은 돈으로 살아 갈 수 있는 곳으로 잘 알려진 hofjes (almshouses ) 라는 곳이 그 기원이 된 것이다. 하지만 동인도의 현지인들이 필요로 하는 유산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But no will ever mentions a legacy for the need of the local population of the East Indies. 현지인들은 야만적인 Hollanders의 눈에 그들의 머리로 신의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존재로 비춰졌기 때문에 그리스트교도의 자비를 요구할 수 없었다.

Holland에서 개화된 분위기가 일면서 현지인들을 같은 동료로서 대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9세기가 되어서였다. 그것은 마치 계획적으로 형식화된 불편한 것이었으나, 향후는 동인도 열도의 현지인들도 염두해 두게 되었다.

잘알려진 애국노래 작사가인 J.P. Heije는 그리 시적이지 않는 매우 독특한 느낌으로 표현했다.

Did not your golden beams
Easter light and Easter glow,
Above Spanish recklessness
flaunt Dutch young freedom?
from that eastern balm air
buddeth Dutch youngest prosperity
till Europe's richest fruit?
Ai, what did thy giveth to Java's beaches
For the Freedom, for the Power,
for the blessing brought to you,
Ai, what hast thou given Netherlands,
when your ships Netherlands,
Returneth with emptied womb,
Sendeth your grace to Java's beaches,
slavery, dullness poverty, death
Deden niet uw gulden stralen
Oosterlicht en oostergloed,
Boven Spanjes overmoed
Neerlands jonge vrijheid pralen
van die oosterbalsemlucht
Neerlands jonge welvaart knoppen
tot Europa's rijkste vrucht?
Ai, wat gaaft ge aan Java's stranden
Voor de Vrijheid, voor de Kracht,
Voor de zegen u gebracht?
Ai, wat gaaft ge Nederlanden?
Als Uw schepen, Nederlanden
Keerden met geleegde schoot
Zond uw dank aan Java's stranden
Slaafsheid, stompheid, armoe, dood.

 Douwe Dekker는 좀더 간명하게 나타냈다:" Goed, goed, alles goed. Maar.... de Javaan wordt mishandeld." (괜찮아 괜찮아 모든게 잘 될 것야 하지만... 자바인들이 학대받고 있어). 17세기 동인도 열도에서의 그랬듯이 동서양의 만남은 어울리지 않는 파트너를 만나 더 힘든 열세를 겪었다. Hollanders 인은 억압과 착취자로 다가왔고 현지의 힘없는 군사를 악용했다. 하지만 데시마(일본의 섬)에서는 다른 모습으로 행해졌다. 그 작은 섬에서 Hollanders은 200년을 머물렀다. 만약 일본인들이 그들의 체류에서 얻을 게 없었다면 포루투칼한데 그랬듯이 그들을 내쫓았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일본과의 계약이 네델란드인들에게 그다지 이득이 되지 못했다면 그들은 그다지 오래 머물지 않았을 것이다. 네델란드와 조선사이에서는 유사한 관계에서 가능하지 않았던 투자의 가치가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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