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기회를 상실하다?

조선에서의 오랜체류 기간후 자국민을 만나기 위해 온 Sperwer호의 선원 15명은 그들 탐험의 모든 면에 대해서 광범위한 심문을 받게 되었다. 질문의 요지는 이 미지의 나라와 우호적으로 교역을 한다면 암스테르담이나 바타비아의 고관들은 과연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있느냐 였다. 그런 연유로 표류기에는 조선과 그 백성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읽을 수 있을 만한 사항들이 쓰여지게 되었고, 하멜과 그의 동료들의 글과 말은 암스테르담 관료들에게 긍적적인 기대를 불러 일으켰다. 그리해서, 1669년 Sperwer호는 Corea란 곳으로 떠나게 되었다.

Batavia 관료는 그렇게 열의를 보이진 않았지만, VOC가 조선에 수출될 물건을 일본에서 가져오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물건의 대부분은 나막신이나 후추, 피혁과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이런식으로 더많은 이익을 얻기위해 물건을 조선으로 직접 가져가는 가능성 조사를 원했고, 하멜이 Batavia에 도착한 직후 데시마 상관장, Daniel Six에게 이 문제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 위한 공식문서가 전해졌다.

상관장의 답변은 기대이하 였으나, 조선과의 교역에대한 독점권은 쓰시마의 Daimyo에게 있다고 지적하고, 일본은 이전의 독점권을 결코 깨트리고 싶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결국 VOC가 일본과의 지속적인 상업관계에 가치를 둔다면, 조선에 대한 모험은 접어 두어야 했다. 그후, Batavia와 데시마 그리고 Batavia와 암스테르담 사이에 서신교환이 몇차례 있었으나 결국, 상관장의 충고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끝나게 되었다. 그 일대 일본의 강력한 지위로 VOC는 조선에 대한 더 이상의 개척을 포기했다. 그리하여 Corea호는 그 이름이 지어진 후 한번도 조선으로 항해하지 못하게 되었다.

1670년 직후 조선과의 상업적인 관계 구축을 목적으로한 VOC선의 조선 항구 정박 시도는 실패하게 되었다. 만약 조선에게 선택권이 있었다면 , 네델란드에게 심한 간섭을 받았을 것이다. 더욱이 조선은 다른 외국인들이 타르타르인이나 일본인과 접촉하는 것을 제외하고 어떤 접촉도 하지 않기로 했. (일본인이나 타르타르인 경우에는 그들에게 선택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이런 결정은 조선이 과거 외국 국가들과의 나쁜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 이었다. 히데요시가 침략한 것은 백년전 이었고, 1636년, 만주족의 침략에 대한 기억도 채 가시지 않았다. 히데요시의 침략이 있기 전까지도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는 조선의 의지는 매우 강했다.

조선의 해안 경비는 삼엄했고, 항구는 패쇄되었다. 게다가 조선은 매우 궁핍했다. 외부적으로는 그런 내색을 안했다: 가진게 없기 때문에 쓸만한게 아무것도 없다. 이런 고립정책의 결과는 결국, 고립의 붕괴를 가져왔다. 조선은 유럽 외부에 개방된 마지막 나라였다.

일본도 외국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이 문호가 굳게 닫혀 있는 동안 일본은 그것을 조금 개방해 놓았다. 이런 연유가 바로 일본이 강한 군대와 해군력으로 더욱 자신감을 가져 강력한 국가가 되게된 사실과 관계 있다.

1543년에 일본은 이미 히라도 섬에 공장을 짓기위해 포르투칼을 허용했다. 이것은 백년후 일본이 그 상업교역 대상을 포르투칼에서 네델란드로 전환하게 되는 행운을 가져왔다. 이는 마치 1588년 스페인 제국의 무적함대 Armada의 붕괴로 스페인이 쇠퇴의 길을 걸었듯이 포르투칼이 결국 세계의 권력 중심에서 그 위상을 잃어 가는 순간을 맞게 된 것이다. 그해, 삼각 늪지에 있던 Schelde, Meuse, Rhine같은 신생 공화국들은 해상에서 그 입지를 잃어 갔고, 일년전인 1587년 Leicester출신의 한병사는 영토를 선었했다.

.....유럽에서 가장큰 습지. 세상의 그 누구도 이렇게 많은 늪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어딜가도 늪지다. 사실 이곳은 피와 정맥으로 가득하지만, 그속에 뼈가 없는 세상의 둔부(엉덩이)와 같은 곳이다.

위 글은 스페인의 억압에 대항해 필사적으로 싸우는 가운데 전멸해가는 공화국을 돕기위해 영국 원정길에 오른 기병대 대장 Henry Unton경이 쓴것이다. 영국은 이것을 17, 18세기경 정치상황을 잘 보여주는 네델란드에 대한 적절한 묘사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를 Republic der Zeven Verenigde Provincien ( 7개 연합 주 공화국)에 대한 선전용으로 사용했다.

Henry경은 Middleburg출신으로 Zeeland지방은 그 당시 육지보다 바다가 많았으며 절반이상의 많은 육지가 바다물에 잠겼다고 적고 있다. 또한, 계속되는 전시상황으로 인해 제방보수에 소홀했으며, 그 중 몇몇은 스페인 군대의 진격을 막기위해 구멍을 내기도 했다. 그 결과, Zeeland는 Middelburg에서 온 토사로 뒤덮히고, Veere, Zierikzee같은 곳은 섬처럼 남게 되었다. Henry경의 늪지에 대한 푸념한 것도 그리 놀랄일은 아니다.

그 어느 누구도 이런곳이 2세대 안에 세상의 중심으로 발전하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현대의 역사가들도 1900년경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그처럼 빠른 발전속도에 놀라워 했다. de Nederlandse Geschiedenis als afwijking van het algemeen menselijk patroon (1988) (네델란드의 역사는 보편적인 인류의 형식을 벗어나 있다) 저술가들은 신생 공화국(네델란드)이 물리-지리학적인 급속한 발전을 이루게 된데에 대한 해명을 찾고 있다. 이들은 다분히 수사학적인 질문으로 논쟁을 마루리 짓고 있다: "호모 홀렌디쿠스" 가 늪지에서 최초로 생겨 난 것은 아닌가?" 일본에게 있어서 교역 상대로서 네델란드인들 을 받아들인 것은 그들이 포르투칼이나 스페인에게 적대적이고, 일본인만큼 카톨릭 종교에 대해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네델란드인들이 일본에 종교 전도자로서가 아닌 순수한 상인으로서 접근한 거부감 없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실 일본의 선택은 당시 유럽에서는 이미 실추되고 있는 관념을 선택했다는 것을 의미했으나, 결국 자유-자본주의 체제를 접하게 되어 신,구세계 양쪽을 다 수용하게 되었다. 일본은 문화양식 전파를 목적으로한 네델란드의 계획후에도 유럽문화를 배울 계획이 없었으나, 수세기 동안의 부분적 문호개방 덕분에 19세기 중반이후 서구관념에 친숙해 질 수 있었다. 그 물꼬를 튼 곳은 바로 데시마였다.

1853년 Perry가 일본에 도착했을 때, 네델란드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 몇몇은 그들이 유럽에서 발전시킨 과학이론도 갖추고 있었다. 다른이는 가장 영향력있는 유럽국가들의 경제체제와 시민권에 대한 지식도 소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과학도구와 정치적 정책결정을 도입하는, 일본에서 몇안되는 사람들 이었다. 그들은 소수였지만, 그 영향력은 실로 대단했다. 그 덕에 19세기 중반 서구문화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조선과 같은 극동에 먼저 들어왔을 때 일본인들의 문화에 대한 충격은 적었다. 헨드릭 하멜과 그의 동료들 이래 1870년 최초 유럽 방문객들은 부패한 조정과 사회로 몰락해가는 왕조를 만나게 되었다.

Matthew Galbraith Perry (1794-1858). 미 함대 사령관으로 일본에게 외국 상선을 개항하게 하고 무역 입출항 금지조치를 철회시킴.

한국에서는 Sperwer호와 그의 선원들(1988년, 3월 31일 방영)이란 제목으로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적이 있는데 한국의 몇몇 사학가들은 1653년 당시 자신의 선조들이 하멜과 그의 동료들을 통해 네델란드의 문화와 경제적인 관계를 가질 기회를 살리지 못한데 대해 애석해 했다. 이들 사학가들에 따르면 Sperwer호의 남은 선원들이 조선과 교역할 VOC 호송선을 가능한 빨리 보내달라는 초청장과 함께 돌아갔다면 나라의 발전이 훨씬 진전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한가지 가능한 추측은 총독과 일본 혹은 타르타르인이 어떻게 반응했을까 인데,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신중하게 처리 되었을 때 대안은 충분히 있었을 것이라 한다.
VOC입장에서 본 또 다른 각본이 있을 수 있는데, Heeren 17세기 데시마 장관의 충고를 거부하고 조선과의 더 큰 이익을 위해 일본과의 경제적 결속을 끊게되는 위험을 감수 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de kool en de geit' (양배추와 염소- 양쪽모두 안전한 상태라는 뜻.)양쪽 모두를 구하기위해, 전쟁을 배재하려는 많은 외교적 노력이 있었다. 당시 네델란드에는 뛰어난 외교적 수완들이 많았기 때문에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일본에 대항하는 타르타르인들을 상대할 임무는 1649년 생인 Hans Willem Baron Bentinck에게 주어졌다. 그는 바로 직후 유럽에서 유사한 임무수행에 성공했다.

Baron Bentinck은 영광스러운 혁명을 이끌 게 된 William III 와 Mary Stuart의 결혼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조선이나 네델란드에게 그런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1653년 조선은 총독에 대한 초청장과 함께 네델란드인들을 타이완으로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1670년경 총독은 제주도를 점령하기 위해 막강한 함대를 보내지 않았다.

사실 네델란드인들이 13년간 조선에 머문 것은 조선의 긴역사에서 보면 짧은 사건에 지나지 않았다. 1668년에 Sperwer호의 마지막 생존자가 떠남으로써 조선은 다시 잠에 빠져 들었고 200년 후 잠자는 숲속의 공주보다 더 거친 모습으로 깨어났다.

이전으로

처음으로

다음으로

 

 

 

 

( Henn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