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계속되나?

하멜표류기는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1666년 10월 23일 Volger씨는 배 7척으로 나가사끼만을 떠났다. 우리는 배가 떠나는것을 보고 매우 슬퍼했다. 우리 역시 선장과 함께 바타비아로 떠나길 희망했으나 나가사끼 총독 이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데시마에서 1년을 더 지낼 수 밖에 없었다.

10월 25일 섬에서 온 통역관이 우리를 총독에게 데리고 갔다. 우리는 수많은 심문에 알고 있는대로 모두 대답했다.
1667년 10월 22일 오후경 우리는 새로운 총독으로부터 떠나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동틀 무렵 닻을 올리고 나가사끼 항만을 떠났다.
이방인들의 땅에서 14년이상 고통스런 방황으로부터 우리들을 자유롭게 해준 하느님께 감사하며 우리는 바타비아항에 도착했다.

(하멜이 데시마에서 자신의 표류기를 기록하였기 때문에 출발일로써 10월 23일을 마지막날로 기록했다. 어떤 날 도착할런는지 하멜은 알지 못했다. 후에 그가 왜 이 날짜를 써 넣지 않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쨌든, 이 지점에서 원고는 공백을 보이는데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날짜는 1667년 11월 28일이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으로부터 헨드릭 하멜과 그의 일행의 "고통스런 표류"는 1666년 11월에 끝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정확히 데시마에서 1년간을 더 머물러야 했고 그것은 별로 달갑지 않았다. 데시마는 나가사끼에 있는 매우 작은 인공섬으로 본국과 다리로 연결되어 있었다. 네덜란드인 은 오직 일본의 허가가 있어야만 이 다리를 지날 수 있었고 그 허가도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단지 일본인이 네덜란드인 에게 물어보거나 말할 것이 있을 때만 소수의 대표가 다리를 통과할 수 있었다. 데시마섬은 정확히 1헥타르 크기로 길고 작은 섬으로 거리 하나가 있고 양쪽에 집이 있다. 1635-36년에 일본인들이 세웠는데 정확히 일본인들이 교역하길 원했던 외국인-청나라인-을 머물게 할 목적이었다.

이 섬에는 원래 포르투칼인들이 머물렀으나 1638년에 일본인들에게 기독교로 개종시키려다가 쫓겨났다. 그리고 몇 년 후에는 네덜란드인들 이 머물게 되었는데 그것은 일본인들은 기독교인이 되지 않을 것을 선언하고 어떤 선교 활동도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였다.

1641년까지 네덜란드인들 은 히라도에 공장을 소유했다. 히라도는 나가사끼 북쪽의 훨씬 큰 섬으로 VOC 활동시에는 lodge라 불렸는데 이 말이 훨씬 자주 사용되었고 포괄의 의미를 지녔던 것 같다. 네덜란드인들 은 1603년부터 1641년까지 38년간 이 섬에 머물렀으며 거기서 이동의 자유가 훨씬 많았다.

그러나 1641년에 네덜란드인들 은 데시마로 옮겨가야 했다. 철수작업은 6월 12일부터 24일까지 계속되었고 1641년 6월 25일 Hirado의 Le Marie 사령관이 와서 한번에 모두 나가사끼로 옮겨갔다. 나가사끼는 완전히 밀집되 있었다. 섬에는 사무소, 창고와 게다가 섬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던 VOC 직원을 위한 주택도 있었다. 지도자인 사령관은 부사령관과 보좌의 지원을 받았다. 사령관은 멋지게 갖추어진 비교적 넓은 곳에서 살았고 그 나머지 직원들은 막사같은 작은 집에 살았다.

항구에 정박해있는 VOC소속 선박의 고급선원으로 임명된 이들이 머물수 있는 객사도 있었는데, 이들 중 한곳에서 하멜과 그의 일행들이 머물렀다. 아마도 그들은 충분한 공간과 사생활을 갖지 못했던 것 같다.

네덜란드인들 은 데시마섬에서 기독교 선교활동을 부여받지 못해서 섬에는 교회나 목사가 없었다. 그들은 죽은 자를 매장할 수도 없었고 그만한 공간도 없어서 사자(死者)는 해안에서 5마일 떨어진 곳에서 바다에 버려져야 했다. 정박지에 정박했던 배에서 돛과 키를 일본인에게 넘겨줘야 했는데, 이것은 그들의 허가없이 떠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성경책들과 총도 내줘야 했고 대포도 잠금장치를 했다.

식량의 일부는 VOC에서 제공하고 일부는 일본에서 가지고 왔는데 대부분이 닭고기, 생선, 신선한 야채와 과일 이었다. 데시마섬에 머물렀던 그들 대부분은 괴혈병으로 고생하진 않았으나 성병에 시달렸다. 사령관은 바타비아에 보내는 공식문서에서 VOC직원들이 정기적으로 다리를 건너온 일본인 매춘부로 인해 이런 질병에 시달렸다고 공표했다. 1641년 8월 19일자 일일 보고서에서 사령관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De Japanders verordonneerden dat geene Hollanders sonder vragen van't Eiland vermochten te gaan. Dat wel hoeren, maar geene andere vrouwen, Japanse papen noch bedelaers op 't Eiland mochten comen " ( 일본은 네덜란드인이 허가없이 섬을 떠날수 없게 했다. 매춘은 허용되었으나, 다른 여자나 일본목사와 궁핍한 일본인들은 제외되었다. ).

공식적인 생활에서 일본인들은 바르게 행동했으나 건방진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일본문헌에는 네덜란드인을 불쾌한 냄새를 풍기는 예의없는 야만인으로 알리고 있다. 조선의 관리와 가진 서신왕래에서도 보이듯이 네덜란드가 어디에 위치한지도 모르면서 종속국으로 간주했다. 종속국의 국민들은 그와 같이 행동해야만 했고 겸손하고 공손하게 일본인들을 대해야 했다.

네덜란드인들이 히라도에 있었을때의 경우가 그랬다. 1633년 5월31일, 주재 장관인 Nicolaes Couckebacker 에게 보내온 Heeren XVII 지침서를 보면:
De Hollanders moeten de Jappanders na de mondt sien en, om den Handel onbecommert te gauderen, alles verdragen. Dat hij sich in alle sijnen handel, wandel ende civilen ommeganck zoo lieftallig, vrundelijck ende nederig tegen allen en een ieder, soowel groot als clijn, sal hebben te comporteren dat hij bij de Japanse natie, die selfs van conditie wonder glorieus is, oock geen grootsheit of hoovaerdij in vreemdelingen can verdragen, bemint ende aengenaem sijn mach . (네덜란드인은 근심없는 교역을 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참아가며 일본인이 듣기 좋은 말만 해야한다. ( Couckebacker ) 라는 이는 그 대상이 크던 작던 누구에게나 협상을 하기 위한 조신한 행동으로 일본이 좋아했는데 그 자체로는 굉장히 유쾌한 일이 었으나 외국인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거만한 행동이었다. )

대부분의 사령관들은 일본에게 아첨을 잘함으로써 자신들을 " 좋아하고 만족하게 "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들의 보고서를 볼때, 마찰이 있으면 사령관이 즉시 교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데시마섬에 있는 네덜란드인의 행위와 동남아의 다른 지역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는 큰 차이가 있다. 현지 사령관이 임하는 계약은 대부분 회사측에 유리한 것인데, 만약 계약이 좋으면 정직하지 못한 것으로 취급받는다. 부정과 부패가 흔한일이었으며 만약 회사측에 폭력으로 저항할 경우, 엄하게 처벌된다.

Formosa 에서 중국은 네덜란드 주거지인 ' Provintien '을 공격해서 회사직원 8명을 살해했다. 보복조치로 군대가 보내졌고 열이틀 동안 중국인에 대한 대량학살로 일어났다. 1652년 12월 24일 공식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Soo werden in den tijt van 12 dagen tusschen de 3 a 4 duisendt rebellige Chineesen in wederwraeck van het verghoten Nederlants Christenbloet on 't leven gebracht." (그리고 열이틀 동안에 네덜란드 기독교인의 희생에 대한 보복으로 2, 3천명의 중국인이 살해됐다.)

데사마 무역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대만과의 무역만큼 회사측에 이득이 되진 못했다. 네덜란드가 일본에 대해 가지고 있던 차별성있는 접근방식은 회사측에 아무런 해도 되지 않았다. 몇몇 보고서에서도 볼 수 있는 일본과의 교역상황은 ' seer profijtelijck ' (매우 유리함) 이었다. 상대를 기분좋게 하는 말로 희생을 한 만큼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혹자는 왜 일본이 헨드릭 하멜과 그의 동료를 가능한 빨리 떠나보내게 하지 않았는지 궁금해 할 것이다. 여기에는 사령관이 소위 말하는 " den Japanchen precisiteyt " ( 일본의 정밀한 계산 )과 관련이 있다. 하멜과 그의 일행은 1666년 10월23일 Esperance 호로 바타비아 로 떠나길 희망했다. 그러나 회사대표측의 반복된 구두와 문서상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요구사항은 거절되었다.

다음해인 10월 22일이 되어서야 하멜과 그의 동료들이 제2의 억압에서 벗어나게 되는 허가가 떨어졌다. 같은날 그들은 정박해있던 Spreeuw ( starling )호에 승선했다. fluitschip (= 세 개의 돛대를 가진 일종의 화물선 )은 1667년 11월 28일 Batavia 에 도착했다.

왜 하멜과 그 일행이 나가사끼를 떠나기 위한 허가를 얻기가 오래 걸렸을까? 일본정부는 그동안 무엇을 했나? 네덜란드인에게서 얻어진 심문보고서는 필요한 허가를 얻기 위해 나가사끼의 지방관에 의해 막부에 전해졌다. 단지 이 보고서가 전달되는데 시간이 좀 걸렸을 뿐이다.

주정부는 즉각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멜과 그 일행의 답변을 확인하길 원했다. 그 결과 그들은 조선의 조정과 서신왕래를 했다. 이것이 시간을 허비했던 절차였다. 복잡한 조서는 shogunate가 조선과 직접 교신하는것을 불가능하게 했고 중재자로서 쓰시마의 Daimyo가 임명되었다. 이것은 그가 조선과 오랫동안 교역을 해온 때문이기도 했다. Daimyo는 부산 근처에 조그만 거주지도 소유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Daimyo가 연간 21척의 배를 입항할 수 있는 동래라고 하는 조그만 항구도 있었다.

일본이 알고자 했던 것은 하멜과 그의 동료들에게 숨겨진 기독교 신봉의지가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Daimyo는 필요한 의식 후에 부산에 있는 관계자에게 서신을 보냈고 아래에 보는 바와 같다:

최근 한 조선인 어부의 배가 Goto-archipelago 섬 근처에 왔다. 승선했던 사람들이 네덜란드에서 온 이방인으로 의심되어 섬의 통지자가 그들을 나가사끼로 보냈다. 거기에서 이들은 심문을 당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네덜란드인 이라했고, 13년전에 일본으로 가는 도중에 조선해협에서 배가 좌초됐다고 했다. 그래서 13년동안 살았고 최근에 탈출했다고 했다.

이방인들은 그들 스스로 상인이라 했으나 사악한 교리로 백성들을 속이기위해 자국에 온 예수의 추종자 의혹이 다분했다. 우리는 당신들의 조정이 양국의 국가적 동일성에 영향을 미칠수 있는 사상의 유입에 대해 우리만큼 우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은 정보를 요구하는 것이다. 상세한 내용은 동래의 대표자에 의해 구두로 잘 통지될 것이다.

이 공식적인 보고서가 조선말로 번역되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그리고 부산에 있는 관계자는 일본과 문서상으로 접할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지방의 통치자에게 연락해야 했다. 통치자는 많은 문제점을 야기시킨 한양으로 서신을 보냈고, 어떻게 답변을 해야 하는지 많은 생각을 해야 했다. 그 당시 네덜란드인들 이 탈출한것은 한양에 알려지지 않았다. 남쪽지방의 통치자는 탈출소식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감추어 두었는데, 어떤이가 그에게 네덜란드인들 은 그작은 배로는 결코 일본에 도착하지 못할것이라고 확신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었다.

동래에 있는 일본 대표자가 전한 어투는 서신에 있던 것 만큼 예의바르지 못했다. 그는 부산시장에게 일본 정부가 다음의 질문들에 대해 받아야 할 답변들을 가능한 빨리 처리해야 한다면서 거만한 말투로 요구했다. :

네덜란드 국적의 배가 13년전에 조선의 해안에 좌초됐다는 것이 사실이며, 너희가 화물을 빼앗았는가? 조선의 해안에 좌초된 모든 외국 선박은 즉시 일본 당국에 보고되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가? 네덜란드 가 일본의 속국임을 모르는가?

이런 강경한 구두 심문은 조선인을 닥달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일본이 자주 사용하는 절차였다. 그들은 매우 예의바르고 상세한 공식적인 보고서를 전달했고, 위협적인 태도로 대화에 임하도록 대표자들 중 한 명에게 지시되었다. 그 질문들은 시장이 기록하여 지방의 통치자에게 전해졌다. 겁먹은 그는 이를 한양에 보냈고, 조선의 조정은 답변을 했다.

사실 13년전에 배는 좌초했으나 우리는 화물을 빼앗지 않았고 좌초당한 사람들에게 돌려주었다. 우리가 알기로는 중국선이 좌초될 때만 일본에 보고해야 하는 것으로 안다. 네덜란드가 어떻게 일본의 속국임을 알 수 있었겠는가. 이들은 일본식 복장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결코 거기에 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곧바로 조선 조정은 쓰시마섬의 Daimyo의 서신에 공식적인 답변을 나타내었는데 매우 정중한 어구로 시작해서 다음과 같이 계속되었다.

1653년, 남쪽 섬앞 해안에 이방인의 배가 좌초되었다. 선원의 절반은 익사했고 36명이 살아남았다. 아무도 그들의 말이나 글씨를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여기에 14년간 머물렀다. 그들은 고기잡이나 나무를 해서 먹고 살았다. 그들은 기독교 교리를 전도하려거나 어떠한 다른 나쁜 사상으로 백성들을 물들이려 하지 않았다. 만약 그런 일이 있었더라면 우리는 즉시 너희에게 알렸을 것이다. 이들 이방인이 진정 기독교인이었다면 일본으로 달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의 추종자들은 순식간에 죽음을 당한다고 들었다. 조선에는 여전히 8명의 이방인이 있다. 원하면 직접 만나서 심문을 해도 된다.

그 서신은 조선은 이웃나라 일본을 조장한다는 가장 최고의 깊은 존경의 뜻을 평소처럼 확신하며 끝맺고 있다. 그 답변은 일본을 만족시켰다. 그들은 안심하고 네덜란드인들 이 더 이상 기독교인이 아니었는지를 의심하지 않았다. 이제 그들은 데시마 장관의 반복된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 하멜과 그의 일행은 데시마를 떠나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고 Daimyo는 조선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썼다:
최근에 우리는 조선해안에서 13년전에 표류했던 선박에 대한 정보를 요구했다. 우리는 아직도 8명이 조선에 남아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그들은 우리나라 속국의 백성이므로 이들을 우리의 섬으로 즉시 보내줄 것을 요청한다.

이 서신은 일본사자에 의해 동래로 보내졌고 1668년 3-4월쯤 조선 사령관에게 전달되었다. 사령관은 한양의 조정에 이 서신을 보냈고 왕과 그의 대신들은 기꺼이 요청을 받아 들였다. 그들은 천벌받은 네덜란드인들 로부터 벗어나는것이 행복했던 모양이다.

지시서가 네덜란드인 이 살고있는 전라도로 보내졌다. 그리고 서신이 일본에 보내졌다. 서신에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8명의 네덜란드인들 중에 1명이 작년에 사망했다. 7명은 여전히 살아있다. 이들을 동래로 이송해서 사신에게 건네질 것이다.

1668년 7명이 쓰시마섬에 도착했다. 여기서 Daimyo는 이들을 나가사끼로 이송하는 일을 맡았다. 힘든 여정 끝에, 그들은 9월 16일 나가사끼에 도착했다. 데시마에서의 일일 기록에는 되돌아온 이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1666년 일본이 한 심문의 끝부분에 하멜이 언급한 것과 같은 이름들이다. Dordrecht에서 온 요리사 Jan Claeszen은 조선의 남쪽인 남원에서 2년전에 사망했다고 적혀있다.

그러나 Nicolaes Witsen이 쓴 1705년 Noorden Oost Tartarije ( North and East Tartary )2판 1부 53쪽에는 그당시 Jan Claeszen은 살아 있다고 적혀있다. 그는 조선에 머무르고 싶어했다. ' Hij was aldaer getrouwt en gaf geen hair aen zijn lyf meer te hebben dat na een Christen of Nederlander geleek .' ( 그는 거기서 결혼도 했고 기독교인이나 네덜란드인 [Dutchman]으로 보이는 어떤 흔적도 갖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했다. )

Nicolaes Witsen은 VOC의 전 통치자였다. 그가 책을 집필할때 많은 문헌을 참조했는데, 항상 믿을 만한 것은 되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하나 확인하기 위해 VOC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하멜과 그의 동료들의 모험에 대해서는 Journael 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이것은 그가 개정판에서 발생한 몇가지 실수를 변경하지 않은 사실에서도 증명되고 있다. 게다가 그는 Sperwer 호에 승선했을때 보조 이발사였던 Meester ( master )Mattheus Eibocken 과도 만났었다. 혹자는 Journael 도중에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 보조 이발사의 입에서 나와 그가 기록했을 것이라 추정할 수도 있다.

일본으로 인해 곤란해지지 않기 위해서 조선은 Jan Claeszen가 죽었다고 보고서에 기록해야 했을 것이다. 같은 이유로 그의 7명의 동료들도 이 메세지를 확인해야 했을 것이다. 그들은 일본으로부터 고향으로 돌아갈 허가를 받지 못하게 될 위험을 피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이 날조된 메세지를 VOC의 보고서에 기록했다. 그러나 Witsen에 따르면 Jan Claeszen는 조선에서 결혼해서 자식을 가지고 있었던 Sperwer 에 승선한 유일한 이가 아니었다. Witsen은: " Kinderen en wijven, die enige daer getrouwt hadden, verlieten ze ." ( 그들은 자식과 부인들을 떠났다. ) 고 적고 있다 .

Hoetink는 조선에서의 이모저모를 기록한 정확한 Journael 원문에서 inboorlingen ( 조선인 , 이지만 경멸하는 식으로 ) 금발머리에 푸른눈을 가진 아이들을 찾아볼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이들 금발머리의 조선인이 Sperwer 호 선원의 후손이라고 생각한다. Hoetink는 이것이 " eveneens omgang hebben gehad met de vrouwen des lands " ( 조선의 여성과 접촉한 ) 조선에 발을 디딘 다른 백인 선원들로 인한 가능성을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Hoetink 스스로가 de afzondering waarin Korea heeft volhard na 't vertrek van de Nederlanders (네덜란드인이 도착한 후 조선이 고집해온 격리정책 )과 " eerst aan het eind van de vorige eeuw Korea gedwongen werd zijn poorten voor vreemdelingen to ontsluiten " ( 세기말 처음으로 외국에 문호를 개방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 )을 설명하고 있다. (1876). 문호개방은 오로지 교역과 관계가 있었다. 엄격주의와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선입관, 외국인에 대한 미움이 이 해 이후에 조선인과 유럽인 사이의 성적관계를 금지하게 했다. 한국전쟁 때에만 혼혈아이들이 태어났다. (1950-1953)

이것으로 푸른 눈에 금발머리의 한국인이 전쟁중에 복무했던 UN군이 아버지가 아닌 Sperwer 호 선원의 자손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이 진술은 최근에 김태진 박사 에 의한 연구가 뒷받침 하고 있다.(김태진은 전라도(하멜은 Thiellado라 함) 광주소재 전남대 도서관장으로 나는 그를 서울에 있는 네덜란드 대사관에서 만났다. 1988년 1월 4일 NRC Handelsblad 지 기사에는 이 조사에 대해 적고 있다:

Al zes jaar lang brengt Tae Jin Kim een groot deel van zijn vrije tijd door met onderzoek naar nazaten van de 17e eeuwse Hollandse schipbreukelingen, die op een eilandje voor de kust aanspoelden. Volgens hem trouwden ze tijdens hun langdurig verblijf in Cholla met Koreaanse vrouwen en zorgden voor een nageslacht met gemengd bloed. "Mensen zijn ontsteld, ja diep geschokt, als ik alleen al suggereer dat ze misshien wel van Hollanders afstammen," zegt Tae. "Ik heb nog niemand gevonden die het wil toegeven, ook al weet ik van sommige families voor bijna 100% zeker dat ze Hollands bloed in de aderen hebben"
6년간 김태진은 좌초되어 섬에 밀려온 17세기 네덜란드 선원들의 후손들을 찾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들은 조선에 오랜기간 조선에 머물면서 조선의 여자와 결혼도 하고 혼혈아인 자식들도 낳았다고 한다. 김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제가 그들에게 네덜란드인들 의 자손이라 고 했을때 그 사람들은 당황했어요, 그래요 충격이 컸죠. " 그걸 인정하려는 사람들은 없었어요. 하지만 그들이 네덜란드의 핏줄을 가지고 있다는 건 확신할 수 있어요."

신문보도 기사는 헨드릭 하멜의 표류기 에서 전라도에는 한 명의 선원이 남았는데, 그는 그동안 결혼하고 몸에 기독교인이라는 어떤 표시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 메세지가 헨드릭 하멜의 표류기 에 쓰여진 내용이 아니라 Nicolaes Witsen의 책 Noorden Oost Tartarije 에 있는 내용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출처는 그 내용보다 덜 중요하다. 전라도 Pyongyong, 순천 그리고 광주의 남동쪽에 있는 남원에 살았던 16명의 네덜란드인 에 대한 김태진 박사의 의견이 신문기사에 실렸다. 그는 이곳에 살고 있는 금발에 푸른눈을 가진 많은 한국인들이 있을 뿐 아니라 이들 대부분이 남씨성을 가졌다는데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남(南)은 한국어로 남쪽을 뜻하는데 한국에서는 흔하지 않은 성씨로 세가 지 계보가 있는데 이들 중 2개는 하멜과 그의 동료가 도착하기전에 이미 존재하던 것이고 세번째는 여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하멜은 그의 표류기 에서 네덜란드인들 이 왕의 호위하에 있을때, 조선의 이름을 받았는데 남씨가 가장 그럴듯 하다는 것이다. 김태진은 그가 발견한 적어도 두개의 네덜란드인 성을 가진 이가 묻혀있는 곳도 찾았다. 이미 사라진 성씨인 Yon ( 네덜란드식 이름인 Jan은 흔히 Yan으로 발음된다. ) 도 있다 .

그는 이 곳에서 남씨가문의 얼굴이 담긴 사진을 찍고 다른 가문의 얼굴 생김새와 비교했다. 김교수는 사회, 역사적인 조사에서 남씨 가문에는 눈에 띄게 많은 변호사, 의사, 교수 그리고 고위 군관료와 행정관이 있음을 알았다.

예를들면 Pyongyong 출신인 북한군 장교 남일은 한국전에서 Pyongyong이 파괴되는것을 구했다고 한다. 이 내용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Jan Boonstra의 흔적조사 of traces
나 (한국어)
일반적인 남씨 성에 대한 사이트

를 참조

가능한 질 문: 네덜란드인들 은 조선에 더 많은 것을 남겨놓았는가.
1. 어느날 전통적인 네덜란드 선율을 가진 한국가요를 들었는데 그것은 전통적인 한국가요라고 했다.
2.한국말로 혼란스러운을 뜻하는 Hollan Hada라는 말의 어원에서 혼란은 두개의 중국문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의 한국식 발음은 "混"과"亂"으로 둘다 혼돈과 무질서를 뜻한다. Doing Hollands ?
3. 왜 한국인들은 어머니를 Omma, (화란어로 할머니를 Oma), 형을 Oppa (화란어로 할아버지를 Opa)라 하는데, 한국말로 영리함을 뜻하는 말은 toktok인데, 네덜란드인은 한국인이 toctoc(화란어로는 바보)한 행동을 했을때 똑똑이라 말하고 그 한국인에게는 그 말이 영리하다는 뜻이라고 속이지 않았을까? 아마 유사한 배경을 지닌 단어들이 더 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을 조사한다는 것이 언어전문가들에는 흥미있을 것이다.
4. 전라도의 병영, 강진사람들은 굽이 높진 않지만 네덜란드인이 하던 식으로 나무조각으로 만든 나무로 된 신발을 신고 있었다.
5. 이곳에서는 한국의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관계시설을 사용하고 있는데 네덜란드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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